[고삼석의 인사이트] AI 시대 K-팝의 미래는 공유현실이다
글: 고 삼 석 동국대 첨단융합대학 석좌교수, 국가 인공지능전략위원회 분과위원
지난 30여 년 동안 K-팝은 한국이 만든 콘텐츠 중 영향력이 가장 큰 글로벌 문화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음악으로 시작하였으나, 지금 K-팝은 영상과 공연, 팬덤과 플랫폼, 그리고 커뮤니티와 첨단 기술이 결합하면서 세계인이 함께 소비하고 참여하는 강력한 ‘문화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K-팝은 콘텐츠 분야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 산업이면서 동시에 국가 브랜드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 K-팝은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그 도전의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생성형 AI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음악을 만들고 있다. 스스로 영상을 제작하고, 안무를 설계하며, 버추얼 아이돌 같은 가상의 아티스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와 전문 제작 시스템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들이 이제 개인 창작자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콘텐츠 생산의 민주화’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K-팝 산업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AI가 음악을 만들고,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시대에 K-팝은 무엇으로 세계인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할까? 더 좋은 음악일까, 더 화려한 영상일까, 아니면 더 강력한 AI 기술일까?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앞으로도 K-팝의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K-팝이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앞으로 경쟁은 콘텐츠 생산 경쟁이 아니라 어쩌면 콘텐츠 이용자들의 경험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공유현실(Share Reality)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공유현실은 국내에서 익숙한 개념은 아니다. 쉽게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도 마치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것처럼 함께 경험하는 구조나 상황을 의미한다. 공유현실은 VR처럼 혼자 헤드셋을 쓰고 몰입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와 달리 공연장이나 극장, 확장현실(XR) 공간, 심지어 도시 공간과 실시간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하나의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다. 같은 순간을 함께 느끼고 향유하고 있다는 이용자들의 ‘감각’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국민들은 이런 경험에 익숙하다. K-팝 콘서트 현장에서의 떼창, 월드컵 거리 응원 등. 같은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팬들이 실시간으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핵심이다. AI 기술은 이런 경험을 더 크고, 더 강하게 확장시키고 있다.
일본, 미국 등 콘텐츠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먼저 ‘기술 기반의 경험 확장’을 새로운 산업으로 만들고 있다. 아뮤즈(AMUSE INC.),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재팬 등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일본 기업 라이브 뷰잉 재팬(Live Viewing Japan)은 일본 내 대형 콘서트, 애니메이션 이벤트, 연극, 뮤지컬, 스포츠 경기 등을 전국의 영화관이나 라이브 하우스에서 위성 중계 및 인터넷으로 실시간 상영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최근 이 회사는 서울에서 개최된 K-팝 공연을 ‘라이브 뷰잉’으로 도쿄에 동시 상영하기도 했다. 이 사업 모델의 핵심은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를 단순 중계하는 것에 있지 않다.
“공연장을 확장하자”는 전략이 진짜 핵심이다. 도쿄에서 열리는 공연을 서울, LA, 파리, 싱가포르 팬들이 동시에 관람한다. 관객들은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응원하고, 환호하면서,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공연이나 경기는 특정 도시에서 열리지만, 현실에서 경험은 다수의 도시에서 동시에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수익은 입장권 판매에만 머물지 않는다. 굿즈, 멤버십, 커뮤니티, 데이터 그리고 재방문 소비가 서로 연결된다. 이 단계에서 공연산업은 경험산업으로 진화한다.
미국은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 최근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업 가운데 하나는 코즘(Cosm)이다. 코즘은 스스로를 공연 회사가 아니라 ‘공유현실 기업(Share Reality Company)’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회사가 만든 대형 돔 공간에서는 스포츠 경기, 영화, 콘서트가 실제 현장처럼 이뤄지고 있다. 관객은 경기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현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입체감과 몰입감 높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코즘은 콘텐츠를 단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공유하는 공간 자체와 이를 통한 경험을 판매한다. 현재 넷플릭스가 집 안의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도시와 공연장 자체가 플랫폼이자 스크린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AI와 공간 기술, 그리고 콘텐츠가 결합하여 새로운 ‘경험 경제’를 만드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 중심에 공유현실이 있다.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떨까?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좋은 조건은 갖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K-팝 IP를 보유하고 있고, 강력한 글로벌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공유현실에 필수적인 초고속 네트워크를 비롯한 인프라는 물론, AI와 XR 기술의 수준도 높다.
사실 K-팝 자체는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공유현실의 초기 형태이다. 수 많은 팬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응원봉을 흔들고,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공연 문화는 하나의 공동 경험 경제를 구현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개별 엔터사 중심의 팬덤 경제를 넘어 기술과 공간을 결합한 하나의 산업 전략으로 확장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K-팝의 새로운 산업 및 글로벌 전략이 필요한 이유이다.
먼저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업 단위의 공연과 콘텐츠 지원 중심 정책을 뛰어넘어 K-팝과 AI, XR, 공간 경험을 서로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공유현실 프로젝트’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연장과 극장 일부를 미래형 경험 공간으로 전환하고, 공연권과 중계권, AI 생성 콘텐츠에 대한 제도 정비도 필요하다.
콘텐츠 정책과 AI 정책을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엔터테크(Entertech) 전략으로 통합해야 한다. 특히 서울과 인천, 경기 성남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엔터테크 허브 전략을 추진한다면 우리나라는 공유현실 분야에서 충분히 선도 국가가 될 수 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인공지능정책 관련 조직을 새롭게 출범시키고, ‘AI 시대 문화강국 실행 전략’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민간 엔터사들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국내 엔터 기업들은 더 이상 아티스트 육성 및 공연 제작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앞으로는 ‘글로벌 경험 플랫폼 기업’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서울에서 개최하는 공연을 도쿄와 싱가포르, 뉴욕과 파리에서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동시에 AI가 관객들의 경험으로 크게 확장시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영국 런던의 아바 보이지(ABBA Voyage)처럼 아티스트의 공연은 끝나도 팬들의 경험은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넥스트 한류’ 시대 K-팝의 새로운 성장 모델이 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류는 콘텐츠를 수출했다. K-드라마와 팝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을 알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문화강국’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음 30년은 달라야 한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많은 콘텐츠를 만드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만드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K-팝의 무대는 특정 공연장과 TV 스크린을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고, 함께 감동하고, 함께 기억하는 ‘공유된 공간(Shared Space)’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공간을 가장 먼저 만들고 세계로 확장하는 나라가 다음 시대를 주도하는 진정한 문화강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