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삼석의 인사이트]경쟁을 넘어 공진화로: 한국과 일본 기업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미래

고삼석 동국대학교 첨단융합대학 석좌교수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기업 간 경쟁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기업들은 경쟁자를 이겨야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장은 제로섬 게임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경제는 다르다. 이제 기업들은 경쟁하면서도 협력하고, 협력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공진화(Co-evolution)’라는 개념을 강조해 왔다.

공진화는 원래 진화생물학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서로 다른 종이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진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꽃과 벌, 숲과 미생물이 대표적 사례다. 이후 진화경제학과 비즈니스 생태계 이론은 이 개념을 기업과 산업, 국가 관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더 이상 홀로 성장하지 않는다. 생태계 속 다양한 파트너와 함께 진화할 때 더 큰 혁신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공진화 파트너’이다. 양국은 오랫동안 경쟁해 왔다. 전자산업, 자동차산업, 반도체산업, 콘텐츠산업에서 치열하게 겨뤘다. 그러나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경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재 부족, 기술 전환, 글로벌 플랫폼 의존, 콘텐츠 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대표적이다. 특히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양국 간 공진화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은 K-팝과 드라마, 웹툰, 게임을 중심으로 글로벌 문화 영향력을 확보했다. 반면 일본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IP, 팬덤 비즈니스, 오프라인 체험 콘텐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 일본에서 개최된‘ASTEEDA Executive Salon 2026’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ASTEEDA는 단순한 비즈니스 행사라기보다 기업가와 투자자, 혁신가들이 새로운 사업 기회를 함께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 각지에서 수백 명 넘는 고위급 경영자들이 직접 참여하며 새로운 투자와 협력, 심지어 인수합병 사례까지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필자(고삼석 동국대학교 석좌 교수)

일본 나가노온센촌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조합은 일본 롯데홀딩스와 한국 이스트소프트 같은 기업들이다. 롯데는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양국의 시장과 소비자, 브랜드 네트워크를 동시에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반면 이스트소프트는 AI, 디지털휴먼, 생성형 AI 서비스 등에서 빠르게 혁신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AI 기업이다.

AI는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다만 AI를 콘텐츠 제작을 돕는 도구 정도로 이해하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AI는 기획에서 제작, 유통, 소비에 이르는 콘텐츠 산업의 가치사슬 전체를 다시 짜고 있다. 기획 단계에서는 데이터가 창작의 출발점이 되고, 제작 단계에서는 생성형 AI가 영상과 음악,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유통 단계에서는 추천 알고리즘이 어떤 콘텐츠를 누구에게 전달할지 결정하며, 소비 단계에서는 AI 휴먼과 AI 캐릭터가 이용자와 직접 마주한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역량과 그 콘텐츠를 학습하고 변형하며 개인화하는AI 역량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행사에서 자사 제품을 설명하고 있는 이스트소프트 담당자

이 지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닮은 처지에 놓여 있다. 두 나라 모두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거대 기반모델(파운데이션 모델)을 자체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생성형 AI의 핵심 인프라를 해외 플랫폼에 의존하는 구조는 양국이 함께 안고 있는 약점이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의 강점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한국은 생성형 AI 서비스와 디지털휴먼, 콘텐츠 데이터 활용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일본은 오랜 시간 축적한 캐릭터IP와 로봇·정밀기술, 방대한 팬덤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스트소프트가 디지털휴먼과 생성형 AI에서 보여주는 행보, 그리고 롯데가 한·일 양국에 걸쳐 쌓아온 유통·관광 데이터는 그 자체로 결합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각자 흩어진 채로 이 흐름에 대응한다면 양국은 똑같이 글로벌 플랫폼의 하청 구조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인재는 부족하고 데이터는 분산되어 있으며, 개별 국가 단위의 시장은 범용 AI 모델을 독자적으로 키우기에 충분히 크지 않다. 그러나 두 나라가 데이터와 IP, 인재와 자본을 함께 모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넘어 아시아의 정서와 서사, 캐릭터와 팬덤을 학습한 콘텐츠 특화AI 모델을 공동으로 만들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범용 모델이 채우지 못하는 영역, 곧 아시아적 맥락을 깊이 이해하는 AI는 양국이 손을 잡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ASTEEDA Executive Salon 2026’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필자. 사진 오른쪽은 다마츠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 왼쪽이 정상원 이스트소프트 대표

AI 시대의 공진화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한국과 일본 기업이 공진화 전략을 추진한다면 어떤 미래가 가능할까. 이번 ASTEEDA Executive Salon에서‘AI 시대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변화와 한·일 공진화’를 주제로 진행된 세션에서 논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AI 기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구축이다. 예를 들어 롯데가 보유한 유통·관광·라이프스타일 인프라와 이스트소프트의 AI 기술을 결합하면 새로운 형태의 고객 경험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AI 캐릭터가 쇼핑을 돕고, AI 휴먼이 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며, K-콘텐츠와 일본 문화 콘텐츠가 동시에 유통되는 융합형 플랫폼도 가능하다.

둘째, 한일 공동IP 개발이다. 한국은 글로벌 콘텐츠 기획과 제작 역량이 뛰어나다. 일본은 캐릭터 비즈니스와 장기 IP 운영에 강하다. 양국 기업들이 공동으로 AI 기반 캐릭터와 스토리 세계관을 구축한다면 아시아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와 현지 진출 상담 중인 한국 기업들

셋째, ‘엔터테크’ 생태계 구축이다. 나는 앞으로 문화산업의 미래를 엔터테인먼트와 테크놀로지가 결합된‘엔터테크’에서 찾고 있다. 콘텐츠와AI, XR, 로봇, 디지털휴먼이 결합하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다. 한국과 일본은 이 분야에서 각각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콘텐츠 기획 및 제작 역량이 강하고, 일본은 로봇과 정밀기술, 캐릭터 산업에 강하다. 양국 기업이 협력한다면 세계적인 엔터테크 허브를 아시아에 구축할 수 있다.

넷째, 동남아시아 공동 진출 전략이다.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각자 경쟁적으로 진출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공동 진출 모델이 필요하다. 한국의 한류 네트워크와 일본의 현지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결합하면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ASEAN) 시장에서 훨씬 큰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일 관계를 경쟁의 프레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강한 기업이 아니라 가장 많은 파트너와 함께 협력하고 성장하는 기업이다. 공진화는 경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해 혁신하고, 협력을 통해 성장한다. 경쟁과 협력이 선순환을 이루는 구조가 바로 공진화이다. ASTEEDA Executive Salon 2026은 그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비즈니스 행사가 아니라 한·일 기업 공진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롯데홀딩스와 이스트소프트의 만남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콘텐츠, AI, 엔터테인먼트, 관광, 유통, 플랫폼 분야에서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한·일 양국 기업의 미래는 경쟁에만 있지 않다. 함께 성장하는 공진화의 길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장으로 향하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성장 전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