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다양성, 5년 만에 역주행… K‑콘텐츠와 공진화에 열린 새 창
- 2021~2022년 정점을 찍었던 미국 TV 다양성 콘텐츠가 2025년 급격히 줄어
- 루미네이트(Luminate), 라틴계·장애인 이야기가 사실상 사라졌음을 보여줘
- 스트리밍 시장 위축과 정치적 역풍이 겹치며, 할리우드 안팎에서 다양성 생태계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음
- FAST의 성장으로 미국 TV·스트리밍 생태계 무게중심은 “광고주가 선호하는 포맷” 쪽으로 이동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다양성을 약속하겠다"고 선언했던 할리우드가 불과 5년 만에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루미네이트(Luminate)의 2025 연말 보고서와 UCLA·GLAAD의 최신 데이터는 미국 TV 신작에서 흑인·라틴계·LGBTQ+·장애인 스토리가 일제히 줄어들며, 2021~2022년 ‘피크 다양성’ 이후 가장 가파른 역주행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트리밍 제작 편수 감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DEI 후퇴, 브랜드 세이프티를 중시하는 광고 시장이 맞물리면서, 다양성은 더 이상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게 됐다.
그러나 반전은 여성 중심 이야기다. 여성 캐릭터의 경험과 시각에 초점을 맞춘 시리즈는 2019년 32편에서 2025년 58편으로 오히려 늘었다. 동시에 이 공백은 미국 밖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서사(K‑콘텐츠,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스토리, 유튜브 기반 크리에이터 IP)가 글로벌 무대에 진입할 수 있는 드문 창으로 열리고 있다.
아울러 FAST와 AI, 크리에이터 경제의 부상, 공영방송·글로벌 공동 제작 네트워크의 역할 확대 등 글로벌 미디어 변화 속에서 “다음 다양성 물결”은 할리우드 내부가 아니라 한국·동남아·아프리카·유럽을 아우르는 새로운 연합지대에서 시작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는 K‑콘텐츠와 K‑엔터테인먼트 테크 산업이 글로벌 파트너들과 함께 공진화 전략(Co-evolution)을 설계해야 할 시점이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2025년, 다양성 콘텐츠는 역대 최저로 무너져
2025년 미국 TV 신작 가운데 다양성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35% 수준까지 떨어졌다. 2023년 43%로 정점을 찍은 지 불과 2년 만이다. 미디어 데이터 분석기업 루미네이트 필름 & TV(Luminate Film & TV)가 추적하는 8개 다양성 항목—흑인, 아시안, 라틴계, 성소수자(LGBTQ+), 장애인, 원주민, 여성 중심, 페미니스트—가운데 라틴계 이야기는 2022년 14편에서 2025년 0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장애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0편으로 집계됐다. 흑인 이야기는 2021년 최고점(96편) 대비 절반 이하인 40편에 그쳤고, LGBTQ+ 스토리 역시 GLAAD 집계 기준 2021~2022 시즌 정점을 지난 뒤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 감소가 아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 이후 할리우드 전반에 퍼졌던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Diversity·Equity·Inclusion) 의제가 5년 만에 사실상 힘을 잃고 있다는 신호다. 루미네이트는 2025년 미국 제작 TV 신작 편수가 전년 대비 11% 줄었다고 분석하는데, 이 과정에서 ‘리스크가 높다’고 여겨지는 다양성 프로젝트가 우선 삭감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DEI 후퇴 기조, 스트리밍 시장 위축, 광고 시장 재편이라는 세 가지 구조적 역풍이 겹치면서, 다양성은 더 이상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왜 지금인가: 세 가지 구조적 원인
① 스트리밍 시장 위축: ‘전성기 TV’의 종말
2022년은 미국 스트리밍 산업의 분수령이었다. 넷플릭스(Netflix)가 그해 1분기 20만 명 순감소를 처음으로 발표하며 “스트리밍 영원한 성장” 신화에 균열이 갔다. 이후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파라마운트 등 주요 스튜디오들이 일제히 콘텐츠 예산과 제작 편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FX의 존 랜드그래프(John Landgraf) 사장이 2015년 처음 경고했던 ‘전성기 TV(Peak TV, 콘텐츠 과잉 생산 시대)’는 2022~2023년을 정점으로 내리막에 들어갔다.
루미네이트에 따르면 미국 스크립티드 TV 신작 수는 2022년 이후 3년 연속 감소했으며, 2025년에는 전년 대비 약 1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총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제작 리스크가 높다고 인식되는 다양성 프로젝트가 우선 삭감 대상이 됐고, 흑인 스토리는 2021년 96편을 정점으로 2022년 95편, 2023년 67편, 2024년 57편으로 매년 감소했다. 이는 트럼프 재집권(2025년 1월) 이전인 2023~2024년부터 하락세가 뚜렷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변수보다 시장 구조 변화가 먼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② 정치적 역풍: 트럼프 2기와 다양성 정책 후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취임 직후 연방정부 내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을 행정명령으로 전면 폐지했다. 민간 기업에 대한 직접 규제가 아니더라도, 워싱턴의 정책 방향은 곧바로 신호 효과로 작용했다. 월마트(Walmart), 포드(Ford),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 등 주요 기업들이 2024년 말부터 다양성 관련 공약과 전담 조직을 축소하기 시작했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디즈니(Disney)는 2025년 연례 보고서에서 “다양성 이니셔티브(Diversity Initiative)”라는 표현을 삭제했고, 파라마운트(Paramount)는 2024년 DEI 전담 부서를 대폭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ESG, Environmental·Social·Governance) 투자 열풍을 이끌었던 대형 자산운용사들 또한 DEI 관련 주주 결의안 지지를 철회하거나 보류하면서, “다양성 콘텐츠 = 장기 투자 가치”라는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이 정치·금융 환경 변화가 맞물리며, 스튜디오와 플랫폼에게 다양성 투자는 필수 과제라기보다 “재검토 가능한 항목”으로 내려앉은 분위기다.
③ 광고 시장 재편: 무료 스트리밍 부상과 ‘안전한 콘텐츠’ 선호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FAST, Free Ad‑Supported Streaming TV)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미국 TV·스트리밍 생태계의 무게중심은 점점 “광고주가 선호하는 포맷”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FAST 채널은 구조적으로 광고 수익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콘텐츠에 더욱 민감하다.
업계에서 ‘브랜드 안전성(Brand Safety)’으로 부르는 이 기준은, 인종·성소수자·이민·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서사를 기피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루미네이트와 삼바TV(Samba TV)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채널에서 다양성 항목에 해당하는 콘텐츠 비중은 유료 구독형 스트리밍(SVOD, Subscription Video on Demand)보다 평균 12~15%포인트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시청 시간이 FAST로 이동하는 만큼, “다양성 서사”의 비중은 편성 테이블과 광고 인벤토리에서 동시에 밀려나고 있는 셈이다.
데이터 심층 분석: 항목별 희비
▶ 흑인 이야기(Black Stories): 4년 만에 절반 토막, ‘블랙 라이브스 매터’ 이후 급반전
흑인 이야기는 2021년 96편으로 정점을 찍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확산되면서, 넷플릭스·HBO·아마존 등이 흑인 창작자 전용 펀드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내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2025년에는 40편으로 떨어지며 정점 대비 58% 감소했다. 루미네이트 분석에 따르면, 흑인 창작자·흑인 출연진이 주도하는 시리즈 상당수가 시즌 2 이전에 종료되거나, 리니어 채널 편성에서 후순위 슬롯으로 밀려나면서 지속성이 약화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의 하이어 그라운드 프로덕션(Higher Ground Productions),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의 OWN 네트워크 등 흑인 소유 제작사들이 다큐멘터리·논픽션·토크쇼를 중심으로 독립 생태계를 유지하며 수요를 떠받치고 있지만, 대형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플랫폼이 추진하던 “흑인 창작자 전담 레이블”의 일부는 통폐합되거나 신규 투자가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구조적 위축은 분명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라틴계 이야기(Latinx Stories): 인구 비중 19%인데, 스크린에서는 ‘사라진 존재’
가장 극적인 변화는 라틴계 이야기다. 2022년 14편이었던 라틴계 중심 시리즈는 2025년 0편으로 집계됐다. 같은 시기 미국 인구조사와 연구기관 집계에 따르면 히스패닉·라틴계 인구 비중은 전체의 19%를 넘어섰고, 어린이·청소년층에서는 이미 4명 중 1명꼴에 이른다. 그럼에도 루미네이트와 UCLA ‘할리우드 다양성 보고서’는 라틴계 주연·공동 주연 TV 시리즈 비중이 일관되게 5% 안팎에 머무르다가, 2025년 들어 사실상 ‘제로(0)’에 가까운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UCLA 엔터테인먼트 연구소는 “라틴계 콘텐츠는 항상 투자 우선순위에서 후순위였고, 예산 삭감 국면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NBC의 《슈퍼스토어(Superstore)》, 넷플릭스의 《젠타운트(Gentefied)》 등 라틴계 커뮤니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조기 종영·취소된 사례도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스페인어권 시장을 겨냥한 텔레노벨라·플루토TV·튜비(Tubi) 등의 FAST 채널로 제작과 유통이 이동하면서, 영어권 주류 TV 통계에서 라틴계 이야기가 더 빠르게 ‘보이지 않게’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 성소수자 이야기(LGBTQ+ Stories): 캐릭터는 늘었지만, 오래 가지 못하는 구조
성소수자 이야기는 2021년 58편으로 최고점을 찍은 뒤 2022년 49편, 2023년 37편, 2024년 27편, 2025년 23편으로 4년 연속 감소했다. GLAAD의 연례 보고서 ‘TV 속 우리의 현주소(Where We Are on TV)’에 따르면, 2024~2025 시즌 미국 방송·케이블·스트리밍을 합산한 LGBTQ+ 정기 출연 캐릭터는 489명으로 여전히 절대 수는 높지만, 이 가운데 거의 절반이 다음 시즌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다수의 리미티드 시리즈와 단 시즌 프로젝트에 LGBTQ+ 캐릭터가 집중되면서, 장기적으로 서사가 이어지는 시리즈가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청소년·가족 대상 콘텐츠에서는 미국 일부 주의 ‘안티‑LGBTQ+’ 교육·콘텐츠 규제 논쟁과 맞물려 보수적인 편성 기준이 강화되고 있다. 그 결과, 성소수자 캐릭터의 존재 자체는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 그들의 삶과 공동체를 중심 서사로 다루는 작품은 점점 줄어드는 ‘양적 포용, 질적 축소’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여성 중심 이야기(Women‑Centered Stories): 다양성 후퇴 속 ‘혼자 버티는 축’
예상 밖의 반전은 여성 중심 이야기다. 루미네이트 데이터 기준 여성 캐릭터의 경험과 시각에 초점을 맞춘 시리즈는 2019년 32편에서 2025년 58편으로 오히려 늘었고, 페미니스트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 수 역시 11편 수준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UCLA의 2024 스트리밍 보고서는 “여성·비백인 여성 창작자 주도 시리즈 비중이 일부 플랫폼에서 후퇴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남성 중심 서사보다 예산 감소 폭이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분석했다.
이는 스트리밍 구독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수치와 맞물린다. 넷플릭스·디즈니+ 등 주요 플랫폼은 여성 시청자를 겨냥한 장르—복수 서사, 역사 로맨스, 가족 드라마, 여성 우정물—를 핵심 성장 카테고리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 《더 글로리》, 넷플릭스 《퀸 샬럿: 브리저튼 외전》처럼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글로벌 히트작은, “여성 중심·비백인 여성 중심 서사가 글로벌 흥행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사례로 반복 인용되며 여성 중심 스토리에 대한 투자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UCLA와 루미네이트 모두, 여성 중심 이야기의 증가가 반드시 인종·성적 지향·장애 등 다른 다양성 축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백인 여성 캐릭터에 집중된 작품이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향후 여성·인종·성적 소수성을 교차적으로 다루는 ‘인터섹셔널 스토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이 카테고리 역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 콘텐츠: 성인보다 더 가파른 하락
성인 콘텐츠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어린이 콘텐츠 지표다.
루미네이트에 따르면 다양성 어린이 TV 시리즈가 미국 신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27%로 최고점에 달했다가 2025년 13%로 급락했다. 불과 2년 사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수치다. 어린 시기에 접하는 미디어 속 다양한 재현은 정체성 형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단순한 장르 축소를 넘어 ‘다음 세대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2026 키드스크린 서밋(Kidscreen Summit, 어린이 미디어 전문 글로벌 컨퍼런스)에서는 이 공백을 메우려는 독립 창작자들의 시도가 집중 조명됐다.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이자 감독인 로예 오쿠페(Roye Okupe)는 약 10년간 자비로 슈퍼히어로 그래픽 노블을 선보인 끝에, 아프리카 풍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담은 자신의 시리즈 『이야누: 차일드 오브 원더(Iyanu: Child of Wonder)』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카툰 네트워크(Cartoon Network)와 맥스(Max)를 통해 선보이게 됐다.
프로젝트의 파이낸싱과 제작을 미국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흑인 소유 독립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라이언 포지 애니메이션(Lion Forge Animation)이 맡았다는 점은, 어린이 다양성 콘텐츠가 할리우드 메이저가 아닌 독립 스튜디오와 글로벌 공동 제작 네트워크를 통해 구현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쿠페는 현재 아프리카 여성 전사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말리카: 워리어 퀸(Malika: Warrior Queen)》을 영국·프랑스·남아프리카 제작사와 공동 제작(Co‑production) 방식으로 추진 중이다. 서사적·비즈니스 측면 모두에서 “할리우드 중심 모델을 벗어나, 나의 가치를 이해하는 파트너와 함께 글로벌 시장을 직접 두드리겠다”는 전략이다.
키드스크린 서밋의 ‘DEI 재조정: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다음인가(The DEI Reckoning: What’s Left, What’s Next, and Who’s Leading the Change?)’ 세션에서 그는, 지금의 후퇴 국면이 오히려 아프리카·아시아·유럽 공영방송·글로벌 OTT가 연합하는 새로운 어린이 콘텐츠 동맹을 촉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어린이 영역에서는, 숫자로 드러나는 급격한 후퇴와 동시에 독립 스튜디오·크리에이터·글로벌 공동 제작을 축으로 한 대안 생태계의 움직임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미국 내 지표만 보면 ‘후퇴’이지만,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제작 주체와 자본 구조가 바뀌는 전환기로 읽을 여지를 남긴다.
대안 생태계: 유튜브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부상
할리우드가 다양성에서 물러서는 사이, 유튜브(YouTube)와 크리에이터 경제(Creator Economy)는 그 빈자리를 일부 채우고 있다.
해피네스트 엔터테인먼트(HappyNest Entertainment) 개발·제작 담당 부사장(EVP) 사다프 먼시(Sadaf Muncy)가 참여한 어린이 애니메이션 《파리 앤 퍼프스(Paris & Pups)》는 성인이 되어서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진단받은 파리스 힐튼(Paris Hilton)이 직접 기획·목소리 출연을 맡은 작품으로, 신경 발달의 다양성(Neurodiversity)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자기 수용과 긍정적 정체성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시리즈는 힐튼의 미디어 기업 11:11 미디어와 해피네스트, 9스토리 미디어 그룹(9 Story Media Group)이 공동 제작하고, 첫 에피소드를 유튜브에서 선공개하는 전략을 택했다는 점에서도 전통적 TV 편성 밖에서 다양성 어린이 콘텐츠를 실험하는 사례로 주목받는다.
먼시는 “유튜브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나 방송사가 시청 등급, 광고주 눈치를 보며 피하는 주제들도 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고 말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특정 관심사를 가진 소수 시청자를 전 세계적으로 정밀하게 연결해 주고, 방송사나 스튜디오 같은 문지기(gatekeeper) 없이 직접 배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이다.
실제 유튜브는 2025년 기준 월 활성 이용자가 약 25억~25억 3천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셜 플랫폼이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닐슨과 각종 시청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TV 화면 기준 스트리밍 시청 시간 1위를 여러 달 연속 유지하고 있고, 광고·구독을 합친 매출 규모에서도 넷플릭스 등 경쟁 서비스를 앞서며 “스트리밍 전쟁의 사실상 승자”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월가 리서치 회사 모펫내선슨(MoffettNathanson)은 2025년 유튜브가 디즈니 미디어 부문을 제치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미디어 회사가 됐다며, 단독 기업으로 분리 상장할 경우 기업가치가 5,000억~5,6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모펫내선슨 분석에 따르면 유튜브는 2025년 한 해 약 6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이 가운데 400억 달러 이상이 광고 매출로, 디즈니·파라마운트·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등 주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광고 수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 리포트는 유튜브를 “새로운 미디어의 왕(New king of all media)”이자 “세계 최대 미디어 회사”로 규정하며, 크리에이터 경제와 AI 도구 확산이 향후 성장 격차를 더 벌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와 시장조사기관 집계에 따르면, 유튜브를 포함한 글로벌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시장 규모는 2024년 약 2,000억~2,100억 달러 수준에서 2030년대 초 8,000억~9,000억 달러대로 성장할 전망이며, AI 기반 편집·분석·마케팅 도구 확산으로 창작자의 생산성과 수익화 효율이 30% 이상 개선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한계도 분명하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조회수·시청 시간·참여도 지표에 최적화돼 있어, 소수자 서사처럼 특정 커뮤니티를 겨냥한 콘텐츠는 추천·노출(discoverability) 측면에서 불리할 수 있다.
파리스 힐튼처럼 이미 막강한 팬덤과 브랜드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 기획한 프로젝트는 비교적 수월하게 시선을 모을 수 있지만, 그런 자원이 없는 독립 창작자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높은 장벽이다. 그럼에도 ADHD·자폐·난독증 등 신경다양성 이슈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전 세계 수천 개 규모로 늘어나고, 일부는 온라인 커뮤니티·교육 자료·굿즈·라이브 이벤트를 결합한 ‘마이크로 IP 비즈니스’로 발전하면서, 유튜브와 창작자 경제는 할리우드에서 밀려난 다양성 서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적 함의: 다음 다양성 물결은 어디서 오나
현재와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경우, 다양성 콘텐츠의 누가 만들고(생산 주체) 어디서 유통되는지(플랫폼·경로) 자체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성을 주목하고 있다.
시나리오 1 — 글로벌 공동 제작 확대
영국 공영방송 채널4(Channel 4), 유럽 문화 채널 아르테(ARTE), 캐나다 공영방송 CBC 등은 여전히 다양성 콘텐츠에 우호적인 정책·편성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공영·공익 채널은 난민, 원주민, 성소수자, 이민 2세대, 장애인 등 상업성이 낮다고 평가받기 쉬운 주제를 장기 프로젝트로 다루면서, 할리우드와는 다른 ‘공영 중심 다양성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유럽·캐나다 공영방송, 남아공·나이지리아 제작사, 아시아 제작사가 참여하는 다자(多者) 공동 제작 포맷은 틈새 전략으로 검증된 상태이며,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K팝 데몬헌터스> 등은 미국 이외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토리가 글로벌 메인스트림 시장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향후에는 유럽 공영방송·글로벌 스트리밍·한국·아프리카 제작사가 결합한 다국적 공동 제작이, 할리우드의 다양성 공백을 채우는 하나의 표준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시나리오 2 — 창작자 경제의 주류화
틱톡(TikTok)·유튜브·인스타그램(Instagram) 등 디지털 플랫폼에서 먼저 검증된 다양성 창작자들이 기존 미디어로 역진입하는 경로도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이미 유튜브·틱톡 출신 코미디언, 뷰티 크리에이터, 퀴어 콘텐츠 제작자 등이 넷플릭스·HBO Max·Hulu 오리지널 시리즈로 확장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으며, 짧은 영상(숏폼, Short‑form)에서 팬층과 세계관을 먼저 구축한 뒤 장편 시리즈·장편 영화로 확장하는 ‘IP 역방향 개발(Reverse IP Development)’ 모델이 업계의 정식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크리에이터는 단순 출연자·인플루언서가 아니라, 포맷 기획자·공동 쇼러너로 참여해 협상력을 높이고, 플랫폼은 초기 리스크를 줄인 상태에서 다양성 IP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시나리오 3 — 다양성 정책 역풍의 역설적 반등
일부 전문가들은 다양성 정책에 대한 반발과 축소 움직임이 오히려 대안 운동과 ‘다음 물결’을 준비시키는 역설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2015년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 캠페인이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구성 다양화를 이끌어낸 것처럼, 현재의 후퇴 국면이 향후 더 강한 반작용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내 정책·투자 환경이 보수적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글로벌 차원에서는 각국 공영방송·규제기관이 현지 제작 쿼터, 로컬 스토리 의무 편성 등으로 자국·지역의 다양한 서사 지원을 강화하는 흐름이 병행되고 있다.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 입장에서도 각국 규제와 현지화(로컬 프로덕션) 요구가 커지면서, 미국 밖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파트너—한국·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동남아 제작사와 크리에이터—에 대한 수요가 동반 상승하고 있다.
이 세 가지 흐름은 공통적으로 “다음 다양성 물결은 할리우드 안이 아니라, 그 바깥—공영방송 네트워크, 창작자 경제, 다국적 공동 제작—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전망으로 수렴하고 있다
결론: ‘조용한 후퇴’를 넘어 구조적 재편으로
루미네이트 데이터가 보여주는 현실은 우리에게 다소 냉혹할 수 있다.
2025년 기준, 라틴계·장애인 이야기의 사실상 완전 소멸, 흑인 이야기 58% 급감, 다양성 콘텐츠 비중의 2023년 대비 8%포인트 하락은, 할리우드의 ‘조용한 후퇴’가 이미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여기 GLAAD의 TV 보고서와 UCLA 할리우드 다양성 보고서까지 더하면, 단순한 편수 감소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서사가 연속성을 잃고 장기적으로 화면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경고 신호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데이터는 동시에 저항의 경로도 보여준다.
여성 중심 이야기의 꾸준한 성장과 비교적 안정적인 페미니스트 서사, 로예 오쿠페·사다프 먼시 같은 독립 창작자들이 구축하는 아프리카·신경다양성 애니메이션 생태계, 유튜브·틱톡·인스타그램과 창작자 경제가 만든 대안 유통망은 다양성 서사가 전통 할리우드 시스템 바깥에서도 계속 생산·소비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월가와 모펫내선슨이 “세계 최대 미디어 회사”로 평가한 유튜브는, 바로 그 대안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다.
이 흐름을 종합하면, 다음 다양성 물결의 출발점은 할리우드 내부가 아니라 아프리카·한국·라틴 아메리카·동남아 콘텐츠 산업, 유럽·캐나다 공영방송, 유튜브 채널, 글로벌 공동 제작 네트워크로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
“누가 스토리를 만들고, 누구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에 더 이상 LA 몇 개 메이저 스튜디오의 투자 계획만으로 답할 수 없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공진화의 시험대: K‑콘텐츠·동남아·FAST가 함께 여는 다음 10년
이 흐름을 종합하면, 다음 다양성 물결의 출발점은 더 이상 할리우드 내부가 아니다. 아프리카·한국·라틴 아메리카·동남아 콘텐츠 산업, 유럽·캐나다 공영방송, 유튜브 채널, 글로벌 공동 제작 네트워크로 중심이 분산되는 재편이 진행 중이다. “누가 스토리를 만들고, 누구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LA 몇 개 메이저 스튜디오의 편성·투자 계획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한국 미디어·엔터테인먼트 테크 산업의 시각에서 보면, 이 변화는 한국과 글로벌이 함께 커지는 공진화(co‑evolution)의 기회로 읽힌다. 단순히 한국 콘텐츠를 수출하고 로열티를 받는 구조가 아니라, 한국·미국·동남아가 기획·제작·유통·데이터·기술을 공유하면서 공동으로 시장을 키우는 모델이다.
고삼석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는 “이제 K‑콘텐츠는 혼자 잘해서 되는 시대가 아니다. 한국, 동남아, 미국이 함께 규칙을 만들고 수익을 나누는 공진화 전략으로 가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못 간다”고 지적한다. 이 발언은 K‑콘텐츠 글로벌 전략의 무게중심이 ‘일방향 수출’에서 ‘동반 성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구체적인 경로도 뚜렷하다.
첫째,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와 FAST 플랫폼은 할리우드가 축소한 다양성·로컬 서사 공백을 메워 줄 새 파트너를 찾고 있고, 그 대안으로 K‑드라마·K‑예능·K‑애니메이션을 포함한 K‑콘텐츠가 비(非)미국산 IP 가운데 가장 검증된 카탈로그로 평가받고 있다.
FAST 시장을 오랫동안 분석해 온 개빈 브리지(Gavin Bridge)는 자신의 ‘FASTMaster’ 리포트와 각종 인터뷰에서 “FAST는 구독 피로감과 경기 침체 속에서 시청자와 광고주가 동시에 선호하는 대안 플랫폼”이라며, 틈새 장르와 해외 콘텐츠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해 왔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K‑콘텐츠는 유료 스트리밍 구독 없이도 접할 수 있는 무료 채널 형태(FAST)로 북미·유럽·동남아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뉴아이디·CJ ENM 등 한국 사업자들은 K‑FAST 채널을 통해 K‑드라마·K‑팝·키즈·영화를 묶은 ‘입구 채널(Entry Channel)’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넷플릭스 같은 구독형 스트리밍 서비스에 더해, FAST를 통해 K‑콘텐츠가 저비용·저장벽 방식으로 미국 시장과 글로벌 시청자에게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루트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ATSC 3.0·데이터캐스팅·IP 기반 차세대 방송 기술에서 한국은 이미 상용화와 시험망 구축을 선도해 왔다. 미국의 싱클레어(Sinclair)는 이 기술을 TV 채널뿐 아니라 데이터 유통·타깃 광고·신규 서비스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는 대표 사업자로, 넷플릭스처럼 완성된 플랫폼에 콘텐츠만 올리는 구조가 아니라 플랫폼과 비즈니스 모델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점에서 한국에 중요한 통로로 평가된다.
한국 방송사가 싱클레어와 함께 ATSC 3.0 기반 채널·데이터·광고 모델을 설계할 경우, 예를 들어 K‑콘텐츠 전용 FAST 채널을 미국 지상파·FAST·데이터캐스팅망에 동시에 얹고, 여기서 나오는 시청 데이터·광고 데이터를 한국·동남아 사업과 연계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는 한국 기술과 K‑콘텐츠를 앞세워 “한국 제작–미국 차세대 방송·데이터 인프라–동남아 및 글로벌 시청자”를 하나의 체인으로 묶는 경로로, OTT 한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루트가 된다.
셋째, 유튜브·틱톡에서 성장한 한국·동남아 크리에이터와 지상파·케이블·스튜디오가 협업하는 ‘역방향 IP 개발’ 모델은, 다양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포맷 실험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먼저 팬덤과 세계관을 온라인에서 검증한 뒤, 방송·스트리밍·영화로 확장하는 이 구조는 제작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소수자·지역·언어 다양성을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결국, 할리우드의 다양성 후퇴는 한국 입장에서 분명한 경고이지만, 동시에 놓치기 어려운 기회이기도 하다.
고삼석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는 한국과 동남아, 그리고 미국 파트너가 함께 판을 설계하지 않으면, 다음 10년 글로벌 미디어 지형에서 K‑콘텐츠가 선도적 위치를 지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한국이 더 이상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넷플릭스에 공급하는 수준’에 머물 수 없으며, 규칙과 수익 구조, 기술·데이터 표준까지 함께 설계하는 쪽으로 역할을 키워야 한다는 경고이자 주문이다.
따라서 다양성을 비용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핵심 성장 엔진으로 재정의하고, K‑콘텐츠·AI·데이터·차세대 방송(ATSC 3.0·데이터캐스팅)·싱클레어와 같은 글로벌 파트너·동남아 제작 네트워크를 하나의 생태계로 묶는 공진화 전략을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행하느냐가 한국 엔터테인먼트 테크 산업 향후 10년의 성패를 좌우할 전망이다.
여기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판을 짜느냐, 아니면 또 다른 글로벌 플랫폼의 하청 구조에 머무르느냐가 K‑콘텐츠 ‘포스트 오징어 게임’ 시대의 최대 분기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