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EU 현지 제작 투자 의무 소송 1라운드 패소

벨기에 헌법재판소, 왈로니-브뤼셀 연방의 스트리머 투자 의무 법령 합헌 결정…EU 사법재판소 추가 심리 예정

K-콘텐츠가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의 판을 바꾸는 사이, 그 판을 장악한  스트리밍 플랫폼을 향한 각국 정부의 규제 의지도 법적 무게를 더하고 있다.

벨기에 헌법재판소는 3월 27일(현지시각) 넷플릭스가 제기한 이의를 대부분 기각하고, 왈로니-브뤼셀 연방(Wallonia-Brussels Federation·FWB)의 현지 콘텐츠 투자 의무 법령이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이 법령에 따라 넷플릭스·디즈니+(Disney+)는 해당 지역 매출의 최소 9.5%를 현지 프랑스어 콘텐츠 제작에 투자해야 한다—기존 2.2%에서 4배 이상 높아진 수준이다.

판결은 단순한 벨기에 법률 이슈가 아니다. EU가 2018년 시청각미디어서비스지침(Audiovisual Media Services Directive·AVMSD)을 통해 각 회원국에 현지 투자 의무 부과 권한을 준 이후, 지금까지 16개국이 동참했다. 콘텐츠 소비는 국경을 무너뜨리고, 플랫폼 권력은 집중되는데—문화 주권 수호를 내세운 각국 정부의 반격이 법정에서 첫 번째 이정표를 세웠다.

사건 배경: 왜 벨기에가 전선이 됐나

K-콘텐츠의 부상이 상징하듯, 미국 기반 스트리밍 서비스의 글로벌 진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유럽 등  글로벌 지역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확장한 스트리밍 서비스는 넷플릭스 뿐만 아니다. 디즈니, HBO MAX, 파라마운트 플러스 등 중소 규모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시작을 확대중이고 최근엔 무료 광고 기반 스트리밍 서비스 FAST의 글로벌 진출도 가속화되고 있다.

진출 국가가 늘어날수록 투자 의무를 둘러싼 갈등도 커지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비영어권 인기 콘텐츠를 다수 공급하는 국가들과 관련된 시장에서는 갈등이 더욱 첨예하다. 이러한 갈등이 가장 두드러지는 지역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은 미국 기반 미디어 테크 플랫폼에 대한 규제가 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럽 시청각미디어서비스지침(AVMSD)은 스트리밍 플랫폼에 최소 30% 이상의 유럽산 콘텐츠 편성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각 회원국이 추가로 현지 콘텐츠 제작 투자 비율을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프랑스가 2020년 최대 25% 수준의 투자 의무를 도입한 이후, 그리스(1.5%), 체코(3.5%), 덴마크, 스페인, 이탈리아 등 총 16개국이 유사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벨기에의 왈로니-브뤼셀 연방(FWB)은 인구 약 460만 명 규모의 소규모 프랑스어권 공동체로, EU 전체 인구의 약 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스트리밍 플랫폼에 대한 투자 의무를 9.5%까지 인상했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산하 기관인 ‘시네마 및 시청각 센터(Centre du Cinéma et de l'Audiovisuel)’에 직접 부담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는 지난해 여름 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디즈니+ 역시 같은 해 11월 이해관계자로 참여했다.

유럽영화진흥기관협회(EFAD) 회장 크리스 마르치치는 이번 소송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는 미국영화협회(MPA)를 배경으로, AVMSD 체계 전반을 흔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 소송을 활용하고 있다.” 즉, 소규모 시장을 표적으로 삼아 EU 전역의 투자 의무 구조를 무너뜨리려는 이른바 ‘트로이 목마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판결 내용: 합헌이지만 문은 열렸다

헌법재판소는 넷플릭스의 주요 이의를 대부분 기각하며 FWB 법령의 효력을 유지시켰다. 다만 4가지 세부 쟁점에 대해서는 EU 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CJEU)에 선결적 판단을 요청해 법적 논쟁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주요 쟁점은 ▲배급권 취득을 투자 실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조항의 적법성, ▲공공 기금 납부 방식의 EU법 합치 여부, ▲타 EU 회원국 납부 분담금의 상계 가능 여부 등이다. ECJ의 첫 심리는 빠르면 2026년 6월 이후이며, 최종 판결까지는 통상 1~2년이 소요된다.

유럽 프로듀서 클럽(European Producers Club·EPC) 사무총장 줄리-잔 레뇨(Julie-Jeanne Régnault)는 "회원국의 문화 정책 주권과 재정 의무 수준을 결정할 재량권이 재확인됐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그는 "문화 다양성은 구체적인 제도와 재원 없이는 보존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넷플릭스 대변인은 "ECJ가 이 사안을 추가로 검토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라는 데 동의하며, 재판소 결정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았다.

트럼프 변수: 관세 전쟁이 스트리밍 규제 논쟁에 불을 붙이다

이번 판결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관세 공세로 미-EU 통상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2월 백악관 메모를 통해 "미국 스트리밍 서비스에 현지 제작 자금 조달을 강제하는" 각국 법령을 명시적으로 겨냥했다. 미국 스트리밍 기업들은 현재 진행 중인 AVMSD 5년 주기 개정 논의를 계기로 투자 의무 완화 로비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넷플릭스 CEO 테드 사란도스(Ted Sarandos)는 이달 초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와 함께 마드리드에서 향후 4년간 10억 유로 규모의 스페인 콘텐츠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법적 공세와 자발적 투자 홍보를 동시에 구사하는 이중 전략—규제 기관을 향한 유화 제스처이자, 의무화 없이도 충분히 투자한다는 메시지다.

K-콘텐츠, 왜 이 싸움의 중심에 있는가

이번 판결과 AVMSD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 콘텐츠 산업에 복합적인 파장을 예고한다.

한국어 콘텐츠는 2023년부터 영어권을 제외한 전체 장르 중 넷플릭스 최다 시청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미디어 컨설팅 기업 암페어(Ampere)와 넷플릭스 등에 따르면 2024년 하반기 기준 한국 콘텐츠는 넷플릭스 전체 시청 시간의 약 8%를 차지하며, 영국(7~8%)·일본(4~5%)을 앞섰다. 이 기간 한국 콘텐츠 총 시청 시간은 77억 시간에 달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시작된 K콘텐츠의 인기는 한 때 바람은 아니다.  오징어 게임(Squid Game) 시즌 2는 출시 이후 2025년 한 해에만 8억 4,030만 시간(1억 1,730만 뷰)이 소비됐고, 시즌 3는 1억 4,240만 뷰를 추가했다. 시즌 1 출시(2021년) 이후 누적 시청 시간을 환산하면 오징어 게임 하나에 쏟아진 시간이 약 60만 1,602년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025년에는 '폭싹 속았수다'(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아이유·박보검 주연)가 4억 8,160만 시청 시간·3,650만 뷰를 기록하며 오징어 게임 외 K-드라마 중 최고 성과를 냈다. 같은 해 넷플릭스 글로벌 톱10에 이름을 올린 K-드라마는 총 17편, 누적 21억 시간·2억 3,080만 뷰다.

2026년은 또 다른 이정표를 찍었다. 3월 21일 BTS의 컴백 라이브 콘서트는 넷플릭스에서 1,840만 명이 시청했고, 24개국 1위·80개 지역 톱10 진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부문 부사장 강동한(Kang Dong-han)은 "한국어 콘텐츠는 이제 영어권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언어 카테고리"라고 공식 확인했다. 그는 K-콘텐츠의 글로벌 팽창이 "아직 초기 단계"라며 추가 성장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런 성과를 배경으로 넷플릭스는 2024~2028년 한국 콘텐츠에 25억 달러(약 3조 4,0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공약했다. 넷플릭스는 현재 한국 시장에서 CJ ENM·JTBC·KBS·SBS·MBC 등과 광범위한 콘텐츠 공급·배급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

넷플릭스와 K콘텐츠의 미래

K콘텐츠의 인기로 넷플릭스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 플랫폼 비영어권 투자 총량 증가:

유럽에서 현지 투자 의무가 강화될수록, 플랫폼은 전 세계적으로 비영어권 콘텐츠 투자 총량을 늘려야 한다는 구조적 압박을 받는다. 넷플릭스 아시아(인도 제외) 콘텐츠 VP 민영 김(Minyoung Kim)은 "현지에 깊이 투자할수록 K-드라마 팬덤이 다음 레벨로 올라선다"고 말했다. 한국 제작사와 IP의 협상력이 높아지는 구조적 환경이다.

▶ 유럽 공동제작 기회 확대:

AVMSD의 '유럽산 콘텐츠 30%' 조항은 플랫폼이 유럽 제작사와의 공동제작을 늘리는 유인이 된다. K-콘텐츠 제작사가 유럽 파트너와 연계해 EU 규정상 유럽산으로 인정받는 공동제작물을 기획하는 전략이 새로운 시장 진입 루트로 부상할 수 있다. 넷플릭스 VP 강동한(Kang Dong-han)도 글로벌 신시장에서 한국 스토리를 다양하게 풀어낼 기회가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국내 규제 논의 촉발 가능성:

유럽 사례가 확산될 경우 한국에서도 글로벌 플랫폼의 국내 투자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다. 강동한 VP는 "지난 5년간 210편 이상의 한국 타이틀이 글로벌 톱10에 올랐다"고 밝혔는데, 이 수치가 오히려 의무화 논거로 활용될 여지도 있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독점 심화를 우려하는 국내 방송·제작 업계 시각도 이미 형성돼 있다.

전망

ECJ의 선결적 판단은 벨기에를 넘어 AVMSD 체계 전반에 대한 사법 해석을 새로 정립할 수 있다. 16개 회원국의 현지 투자 의무 구조에 연쇄 영향이 불가피하며, 넷플릭스와 MPA는 ECJ 심리 기간(통상 1~2년)을 AVMSD 개정 협상의 레버리지로 적극 활용할 것이다. 한편 한국 콘텐츠가 영어권 다음의 글로벌 2위 시청 언어로 자리 잡은 현실은, 이 싸움의 무게를 한국 업계가 남의 일로만 볼 수 없게 만든다. 플랫폼 자본이 국경을 무력화하는 속도만큼, 콘텐츠 주권을 지키려는 각국의 법적 의지도 빠르게 구체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