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청자, 영화·TV 제작에서 생성AI에 여전히 불편…기술 보조는 수용하되 ‘배우 대체’에는 강한 거부감
미국 시청자들은 영화·TV 제작에서 생성AI를 더 많이 마주하게 됐지만, 여전히 ‘기술적 보조’ 수준까지만 조심스럽게 허용하고, 각본과 배우를 대체하는 활용에는 뚜렷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정서는 향후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AI를 도입할 때도 인간 창작자와 배우의 권리를 어디까지 지킬 것인지, 한국형 가이드라인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를 던진다.
미국 시청자, “AI는 도구일 뿐”…배우 대체에는 선 긋기
시장조사업체 루미네이트에 따르면, 미국 영화·TV 시청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설문은 각본·연기·시각효과 등 세부 제작 공정별로 생성형 AI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응답 결과 전체적으로 “매우/다소 편안하다”는 비율보다 “다소/매우 불편하다”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나, 시청자들이 AI 활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실제 배우를 디지털로 복제하거나 완전히 인공적인 가상 배우를 등장시키는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하다’는 응답이 가장 높게 집계돼, 배우를 대체하는 AI 활용에는 분명한 심리적 ‘레드라인’이 존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액션에 맞춰 소리를 입히는 사운드 이펙트나 배우의 나이를 조정하는 고품질 특수·시각효과(VFX), 외국어 콘텐츠를 자연스럽게 다시 말하게 하는 AI 더빙 등은 상대적으로 수용도가 높은 편이다. 이들 영역에서는 ‘매우/다소 편안하다’와 ‘다소/매우 불편하다’ 비율이 비슷하거나, 불편 쪽이 근소하게 높은 수준에 그쳤다. 시청자들은 AI가 인간 창작자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 선에서 작업 효율과 작품 완성도를 높이는 보조 도구로 쓰일 때까지는 어느 정도 허용하겠다는 입장에 가까운 셈이다.
각본·캐릭터·목소리, ‘창작의 심장부’에는 여전히 냉담
같은 조사에서, 시청자들이 가장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영역은 각본 및 캐릭터 창작, 그리고 내레이션·보이스오버 등 목소리 관련 작업이었다고 루미네이트는 설명한다. AI가 스토리 구조를 설계하고 대사를 쓰는 ‘스크립트/시나리오 작성’에 대해서는 불편 응답이 편안 응답보다 확연히 높았고,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에서 AI가 내레이션을 맡는 것 역시 편치 않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는 이야기와 목소리를 인간 고유의 표현 영역으로 보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는 의미다.
새로운 캐릭터 디자인이나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제작 등 시각적 창작 보조 영역도 수용과 거부가 팽팽히 맞섰다. 제작 현장에서는 아이디어 발굴과 콘셉트 스케치에 AI를 적극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시청자들은 캐릭터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AI가 찍어낸 느낌’으로 흐려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미국 시청자는 AI의 창작 개입이 깊어질수록 편안함이 줄어드는 일종의 “안전거리”를 설정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디지털 휴먼·가상 배우, “멋지지만 불편하다”는 역설
루미네이트 조사에서 가장 높은 거부감을 보인 항목은 사망한 배우의 디지털 복제, 생존한 배우의 얼굴과 몸을 본뜬 디지털 복제, 실제 사람이 아닌 완전히 인공적인 AI 배우 등 세 가지였다. 세 경우 모두 인간 배우의 자리를 부분 또는 전면적으로 대체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응답자들은 이러한 활용을 “기술적으로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불편하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이를 두고 초상권·퍼블리시티권, 사후 인격권 등 법적·윤리적 쟁점과 결합될 경우 향후 대형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 리스크라고 지적한다.
AI 배우가 주연을 맡고 인간 배우는 조연이나 모션 캡처 제공자로 밀려나는 시나리오에 대한 우려도 크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최근 파업과 단체 협상을 통해 배우·작가 노조가 AI 활용 범위와 보상 구조를 계약에 명시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이는 시청자들의 거부감이 단순한 정서적 반발을 넘어 산업 구조와 권리 분쟁에 대한 선제적 경계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K-콘텐츠 경쟁력 지키려면 ‘AI 활용의 선’ 먼저 그어야
이 같은 미국 소비자 인식은 AI 도입 속도가 빠른 한국 콘텐츠 산업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가상 아이돌과 AI 인플루언서, AI 성우를 활용한 더빙·내레이션, AI 기반 편집·합성 등은 이미 제작비와 시간을 줄이는 수단으로 활발히 쓰이고 있지만, 글로벌 시청자들은 “AI가 작품을 돕는 것”과 “사람을 대체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배우·가수·성우·크리에이터의 초상과 목소리를 학습·복제하는 모든 AI 활용에 대해 계약서에 범위·보상·2차 활용 제한을 명확히 명시하는 표준 가이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AI로 생성된 장면과 인물을 작품 안팎에서 어디까지 공개할지, 엔딩 크레딧·메이킹 영상·메타데이터에 어떤 정보를 투명하게 고지할지도 업계 차원의 룰로 합의해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상태에서 작품을 선택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신뢰 훼손과 보이콧을 피할 수 있다.
또 한국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정기 조사를 통해 어떤 영역까지는 AI를 허용하고, 어디부터는 불편함을 느끼는지 데이터를 축적한다면, 제작사는 시리즈 기획 단계에서부터 “AI를 어느 공정까지 쓸 것인지”, “어디는 반드시 인간 창작자가 직접 맡아야 할지”를 전략적으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은 앞서지만, 인간의 얼굴과 창작자의 권리는 더 존중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AI 시대에 오히려 차별화된 브랜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결국 한국이 지금 논의해야 할 핵심 질문은 “AI를 얼마나 많이 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는 절대 인간을 대체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인가”다. 지금이 바로 산업과 시청자가 함께 그 선을 그려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