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코드커팅(Re cord cutting)' 시대 열린다…유료 스트리밍 떠나 무료로 향하는 소비자들
'리코드 커팅' 시대, 유료 스트리밍을 끊는 소비자들
케이블 끊고 넷플릭스 갔더니…이번엔 넷플릭스가 케이블 값
케이블TV를 해지하고 스트리밍으로 옮겨갔던 소비자들이 이번엔 유료 스트리밍마저 끊고 있다. 주요 서비스들의 잇단 가격 인상에 지친 시청자들이 무료 광고 기반 스트리밍(FAST)으로 대거 이동하는 '리코드 커팅(Re-Cord Cutting)' 현상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미디어 전문매체 Axios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주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들의 최저가 무광고(ad-free) 요금제는 출시 이후 평균 6.69달러(약 9,000원) 인상됐다. 업계에서는 이 현상을 '스트리밍 인플레이션(Streaming Inflation)'이라 부른다.
'코드 커팅' 시대를 열며 케이블TV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스트리밍 서비스가, 이제는 오히려 소비자들의 지갑을 압박하는 주범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케이블을 끊으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약속은 어느새 빛바랜 구호가 됐다.
디즈니+, 넷플릭스, 훌루…'인상 3인방'의 질주
가격 인상폭이 가장 큰 서비스는 단연 디즈니+(Disney+)다. 2019년 11월 스트리밍 시장에 후발 주자로 진출하며 6.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내세웠던 디즈니+는 현재 최저가 무광고 요금제를 18.99달러에 제공하고 있다. 출시 대비 약 172% 인상된 셈으로, 사실상 3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디즈니+의 초기 저가 전략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다. 마블, 스타워즈, 픽사 등 강력한 IP를 무기로 단기간에 1억 명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한 뒤, 본격적인 수익화 단계에 접어들며 가격을 공격적으로 올리고 있다. 월가의 수익성 압박이 거세지면서 "성장보다 이익"이라는 기조 전환이 가격표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넷플릭스(Netflix)와 훌루(Hulu)도 만만치 않다. 두 서비스 모두 출시 이후 최저가 무광고 요금제를 각각 9달러씩 인상했다. 특히 넷플릭스는 스트리밍 시장의 선두주자로서 수년간 꾸준히 가격을 올려왔다. 2011년 스트리밍 전용 요금제를 7.99달러에 선보였던 넷플릭스의 기본 요금제는 현재 17달러에 달한다.
넷플릭스의 가격 정책은 업계 전체의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넷플릭스가 인상을 단행하면, 경쟁사들도 "넷플릭스도 올렸으니"라는 명분으로 뒤따르는 패턴이 반복됐다.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의 선도자인 셈이다.
반면 HBO 맥스(HBO Max)는 상대적으로 인상폭이 작았다. 출시 이후 3.50달러 인상에 그쳤다. 다만 이는 2020년 서비스 론칭 당시부터 경쟁사 대비 높은 14.99달러로 가격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등 프리미엄 오리지널 콘텐츠를 앞세워 처음부터 고가 전략을 택한 것이다. 애초에 높은 곳에서 출발했기에 인상 여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분석이다.
스스로 만든 리-코드 커팅(Re-Cord Cutting) 시대
'리코드 커팅'은 '한 번 더 끊는다'는 의미다. 케이블을 끊고 스트리밍으로 넘어갔던 소비자가, 다시 유료 스트리밍을 끊고 무료 스트리밍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표현한다.
2010년대의 '코드 커팅'이 케이블TV라는 낡은 질서에 대한 반란이었다면, 2020년대 중반의 '리코드 커팅'은 스트리밍 업계 스스로가 자초한 소비자 이탈이다. 케이블TV의 비싼 번들 요금제에서 벗어나려 스트리밍을 선택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스트리밍 구독료 총합이 케이블 요금을 넘어서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넷플릭스, 디즈니+, HBO 맥스, 훌루 등 주요 서비스 4~5개를 동시에 구독하면 월 70~80달러를 훌쩍 넘긴다. 여기에 스포츠 스트리밍까지 추가하면 100달러를 초과하기도 한다. 과거 케이블TV 기본 패키지 요금과 맞먹거나 오히려 비싼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케이블TV를 끊고 스트리밍으로'라는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유료 스트리밍을 끊고 무료 스트리밍으로'라는 새로운 코드 커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FAST 서비스,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의 최대 수혜자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의 직접적인 영향은 소비자 행동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비용 부담을 느낀 이용자들이 투비(Tubi), 로쿠 채널(Roku Channel), 플루토TV(Pluto TV) 등 무료 광고 기반 스트리밍, 이른바 'FAST(Free Ad-Supported Streaming TV)' 서비스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FAST 서비스는 광고를 시청하는 대신 무료로 콘텐츠를 제공한다. 구독료 부담 없이 다양한 영상을 소비하려는 이용자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물론 최신 오리지널 콘텐츠 대신 라이브러리 콘텐츠 중심이고, 광고 시청이 필수라는 단점이 있지만, "공짜"라는 강력한 무기 앞에서 많은 소비자들이 타협하고 있다.
실제로 투비는 최근 월간 활성 이용자 수가 급증하며 스트리밍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폭스(Fox)가 소유한 투비는 2024년 들어 미국 내 스트리밍 시청 시간 점유율에서 상위권에 안착했으며, 슈퍼볼 광고까지 집행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최신 시청률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닐슨(Nielsen)이 12월 16일 발표한 '더 게이지(The Gauge)' 11월 리포트에 따르면, 로쿠 채널은 전월 대비 9% 성장하며 역대 최고치인 TV 시청 점유율 2.9%를 기록했다. 특히 25~34세 시청자층에서 23%의 급성장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유료 스트리밍의 핵심 타겟이었던 젊은 성인층이 FAST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FAST 시장 자체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에 따르면, 글로벌 FAST 시장 규모는 2025년 약 58억 달러에서 2030년 106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CAGR) 12% 이상의 고성장 시장인 셈이다.
번들의 역설: 해체했던 것을 다시 묶다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은 업계 지형도 바꾸고 있다.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비용에 민감한 소비자들을 붙잡기 위해 서비스 통합(consolidation)과 재결합(rebundle) 전략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디즈니의 번들 상품이다. 디즈니는 디즈니+, 훌루, ESPN+를 하나로 묶은 번들 요금제를 제공하며 개별 구독 대비 상당한 할인 혜택을 내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광고 포함 트리오 번들을 월 16.99달러에 제공하는 등 가격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 역시 맥스(Max)와 디스커버리+ 통합을 추진했으며, 디즈니, 폭스와 함께 스포츠 전문 스트리밍 서비스 '베누 스포츠(Venu Sports)' 합작을 발표하기도 했다.다만 이 합작은 반독점 우려로 법적 도전에에 직면해해 좌절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블TV 시대의 '번들' 모델을 해체하며 성장했던 스트리밍 업계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다시 번들 전략으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들이 "채널 골라 담기"의 자유를 원했지만, 그 자유의 비용이 너무 비싸지자 다시 "묶음 할인"을 찾게 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스트리밍의 케이블화"라고 부른다. 개별 서비스들이 각자의 킬러 콘텐츠를 인질 삼아 구독을 요구하고, 소비자는 결국 여러 서비스를 묶어서 구독하게 되는 구조가 과거 케이블TV 번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음악 스트리밍도 예외 아니다
가격 인상 추세는 영상 스트리밍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포티파이(Spotify), 애플뮤직(Apple Music), 아마존뮤직(Amazon Music) 등 주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출시 이후 월 구독료를 평균 1달러씩 인상했다.
특히 스포티파이는 2023년과 2024년 연속으로 미국 시장에서 가격 인상을 단행하며 논란이 됐다. 오랜 기간 9.99달러를 유지해왔던 프리미엄 요금제가 현재 11.99달러까지 올랐다. 10년 넘게 "9.99달러"라는 심리적 가격선을 지켜왔던 음악 스트리밍 업계의 불문율이 깨진 것이다.
음악 스트리밍 업계는 아티스트 로열티 지급 비용 증가, 팟캐스트·오디오북 등 신규 콘텐츠 투자, 수익성 개선 압박 등을 가격 인상의 이유로 들고 있다. 스포티파이의 경우, 오랜 기간 적자에 시달리다 최근에야 흑자 전환에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격 인상이 핵심 역할을 했다.
다만 음악 스트리밍은 영상 스트리밍에 비해 "멀티 호밍(multi-homing)"이 적다. 즉, 여러 서비스를 동시에 구독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이용자가 한 개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만 구독하기 때문에, 가격 인상이 총 구독료 부담에 미치는 영향은 영상 스트리밍보다 상대적으로 작다.
광고 요금제의 부상: 새로운 중간 지대
유료 스트리밍 업체들도 FAST 서비스에 소비자를 완전히 뺏기지 않기 위해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바로 '광고 포함 저가 요금제(ad-supported tier)'다.
넷플릭스는 2022년 11월 광고 포함 요금제를 6.99달러에 출시했다. 광고 없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고집해왔던 넷플릭스로서는 큰 전략 변화였다. 디즈니+, 맥스, 피콕 등 다른 주요 서비스들도 비슷한 광고 요금제를 운영 중이다.
광고 요금제는 완전 무료인 FAST와 비싼 무광고 요금제 사이의 중간 지대를 공략한다. 최신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고 싶지만 무광고 요금을 내기엔 부담스러운 소비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넷플릭스의 광고 요금제 가입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광고 요금제 이용자는 매달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광고 매출도 의미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는 스트리밍 인플레이션 시대에 소비자들이 광고를 감수하더라도 비용을 줄이려는 경향이 뚜렷함을 보여준다.
2026년 전망: 숨 고르기인가, 폭풍 전야인가
내년에는 가격 인상 압력이 다소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미국 내 8개 주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중 5곳이 이미 가격 인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연속적인 가격 인상은 소비자 이탈을 가속화할 수 있어, 2026년에는 업체들이 다소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공격적인 가격 인상은 해지율(churn rate) 급등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미 여러 조사에서 미국 소비자들의 스트리밍 서비스 "순환 구독(subscribe-watch-cancel)"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을 때만 잠깐 구독하고, 시청 후 바로 해지하는 패턴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가격 인상 기조가 완전히 멈추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콘텐츠 제작비 상승, 스포츠 중계권료 급등, 수익성 개선에 대한 월가의 지속적인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포츠 중계권은 스트리밍 업체들에게 양날의 검이다. NFL, NBA, MLB 등 주요 스포츠 리그의 스트리밍 중계권료가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있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NFL 목요일 밤 경기 중계권에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비용 부담은 결국 구독료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선택: '선택과 집중'의 시대
스트리밍 인플레이션 시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업계 전문가들은 "선택과 집중"을 조언한다. 여러 서비스를 동시에 구독하기보다 한두 개 서비스만 유지하거나, 순환 구독 전략을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시리즈가 공개될 때만 해당 서비스를 구독하고, 시청 후 해지한 뒤 다른 서비스로 옮겨가는 방식이다. 광고 포함 저가 요금제나 패밀리 플랜 활용, FAST 서비스를 보조 수단으로 삼는 것도 유효한 전략이다.
사업자 입장에서도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은 양날의 검이다. 단기적으로는 ARPU(가입자당 평균 매출) 상승과 수익성 개선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비자 이탈과 브랜드 신뢰 하락이라는 리스크를 안게 됐다. '순환 구독' 현상의 확산은 곧 고객 충성도의 약화를 의미하며, 이는 안정적인 구독 기반 확보라는 스트리밍 비즈니스의 근본 전제를 흔든다.
결국 스트리밍 사업자들은 '가격 인상'과 '가입자 유지' 사이에서 정교한 균형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무분별한 인상은 FAST로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가격 동결은 콘텐츠 투자 여력을 약화시킨다. 번들 전략, 광고 요금제 확대, 독점 콘텐츠 강화 등 다양한 카드를 조합해 '가격 대비 가치(value for money)'를 입증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스트리밍 인플레이션은 소비자에게는 "정말 필요한 서비스가 몇 개인가"라는 질문을, 사업자에게는 "우리 서비스가 그 '필요한 몇 개' 안에 들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케이블TV의 번들을 해체하며 시작된 스트리밍 혁명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선택과 집중'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