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메가 통합’ 본궤도…경쟁 촉진 논리로 반독점 문턱 넘었지만 주(州)·유럽·노동계 관문 남아
미 법무부가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의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 인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승인했다. 자산 매각도, 행위 제한도, 별도 시정 조치도 요구하지 않은 ‘무조건부’ 승인이다. 두 레거시 스튜디오를 한 회사로 묶는 할리우드 최대급 통합이 가장 큰 규제 관문을 넘어섰다.
이번 결정의 무게는 단순한 한 건의 합병 승인에 그치지 않는다. 스트리밍 시장이 넷플릭스·아마존·디즈니 같은 소수 플랫폼과 빅테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개별 전통 미디어 기업이 단독으로 콘텐츠 투자·기술·인재 경쟁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산업 구조가 이번 판단의 배경에 깔려 있다. 규제 당국은 거대 기업의 ‘몸집 키우기’를 경쟁 제한이 아니라, 지배적 플랫폼에 맞설 경쟁 촉진 요인으로 받아들였다.
‘경쟁·소비자에 해 없다’…반독점국, 시정조치 없이 종결
법무부 반독점국은 12일(현지시간) 성명에서 파라마운트와 워너브러더스 합병이 경쟁이나 미국 소비자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가 처음 보도하고 버라이어티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반독점국은 자산 매각이나 행위적 시정조치, 별도의 양보 조건을 일절 요구하지 않고 거래를 승인했다.
반독점국은 주문형 스트리밍(SVOD)과 선형 TV, 극장 개봉용 영화의 개발·제작·배급 등 핵심 영역 모두에서 경쟁 저해 우려가 크지 않다고 봤다. 두 회사의 결합이 HBO맥스와 파라마운트+를 묶어 “더 강력한 경쟁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넷플릭스·아마존·디즈니 같은 대형 플랫폼에 맞설 스트리밍 경쟁을 오히려 키울 것이라는 논리다.
‘경력 직원 주도, 8개월 조사’…정치 특혜 의혹 차단 프레이밍
반독점국은 이번 심사가 “경력 직원 주도”로 진행된 “엄정한” 8개월 조사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80개 이상 당사자로부터 200만 건이 넘는 문서를 받았고, 고위 임원 진술과 제3자 인터뷰, 당사자들과의 실무 회의를 거쳤다는 설명이다. 영화·TV 산업이 매우 역동적이며, 이 거래가 경쟁이나 소비자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조사 절차를 상세히 공개한 것은 정치적 특혜 논란을 의식한 대목으로 읽힌다. 데이비드 엘리슨 가문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 탓에 심사가 느슨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일찍부터 제기됐기 때문이다. 앞서 3월 반독점국 대행 책임자 오미드 아세피는 이 거래가 정치적 이유로 “절대 패스트트랙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반독점국이 8개월이라는 조사 기간과 ‘경력 직원 주도’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 발언의 연장선에 있다.
뉴스·스튜디오·스트리밍·케이블 한 지붕…재편되는 미디어 지형
합병이 마무리되면 파라마운트의 CBS·CBS뉴스·파라마운트픽처스·파라마운트+가 WBD의 HBO·HBO맥스·워너브러더스픽처스·CNN·TNT·TBS·HGTV 등과 한 회사로 묶인다. 지상파 뉴스와 케이블 채널, 영화 스튜디오,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을 동시에 거느린 초대형 미디어 그룹이 탄생한다
거래 규모는 보도 매체에 따라 차이가 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810억 달러로, 버라이어티는 1110억 달러로 전했다. 부채를 포함한 기업가치 기준과 주식 인수 기준의 차이로 풀이된다. 어느 쪽이든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거래이며, 콘텐츠 제작·유통의 협상 창구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산업 지형 전반에 파장이 예상된다.
[분석] ‘규모의 경쟁’ 인정한 반독점 잣대…빅테크가 기준점
이번 승인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반독점 판단의 기준선이 ‘전통 미디어 내부의 점유율’이 아니라 ‘빅테크를 포함한 전체 콘텐츠 생태계’로 옮겨갔다는 데 있다. 과거의 잣대였다면 두 거대 스튜디오의 결합은 영화·TV 제작과 케이블 채널에서의 집중도를 이유로 제동이 걸렸을 사안이다. 그러나 반독점국은 경쟁 무대를 넷플릭스·아마존·구글·애플 같은 플랫폼까지 넓혀 잡았고, 그 안에서는 합병 회사조차 도전자에 가깝다는 논리를 받아들였다.
이는 스트리밍 경제가 콘텐츠 시장의 셈법을 바꿔 놓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하고 글로벌 가입자 기반을 유지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몸집이 전제돼야 한다는 인식이 규제 판단에까지 반영된 셈이다. 같은 논리가 앞으로 다른 미디어 M&A 심사에도 준거점으로 작동할 수 있다.
60억 달러 비용 절감 예고…노동계·창작자 거센 반발
산업 내부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파라마운트 경영진은 합병으로 60억 달러 이상의 비용 절감을 달성하겠다고 밝혀 왔는데, 이는 대규모 감원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수치로 받아들여진다. 통합 이후 중복 조직 정리와 채널·인력 구조조정이 뒤따를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영화·배우 등 할리우드 종사자 5500명 이상이 ‘BlockTheMerger.com’ 공개서한에 서명하며 합병에 반대했다. 일자리 감소와 가격 인상, 경쟁 축소를 이유로 들었다. 작가조합(WGA)이 서한 조직에 참여했고, 플로렌스 퓨, 페드로 파스칼, 에드워드 노턴, 호아킨 피닉스, 벤 스틸러, 크리스틴 스튜어트, 마크 러팔로, 로지 오도넬, 테드 댄슨, 티퍼니 해디시, 요르고스 란티모스, 로버트 드 니로 등이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팀스터스 노조는 파라마운트가 일자리 감축을 막을 “실질적이고 강제력 있는 안전장치”에 합의하고 미국 내 제작 확대를 약속하지 않는 한 거래를 막아야 한다고 법무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반독점국은 노동시장 우려에 대해서도 통합 회사가 산출을 유지하거나 늘릴 유인이 있다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승인은 절반…주 법무장관·유럽·영국 심사 ‘첩첩’
법무부 승인에도 거래가 최종 완결된 것은 아니다. 로버트 본타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주(州) 법무장관들은 반독점을 근거로 합병 저지 소송에 나설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방 차원의 승인과 별개로 주 단위 제소가 변수로 남아 있는 셈이다.
유럽 쪽 심사도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인수 자금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아부다비 국부펀드가 댄 약 240억 달러를 외국보조금규정(FSR)에 따라 들여다보고 있으며, 잠정 심사 시한을 7월 14일로 잡았다. 일반 합병 규정에 따른 심사 시한은 7월 7일이다. 영국 경쟁시장청(CMA)도 지난 9일 이번 합병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이 무조건부 승인으로 길을 터준 것과 달리 유럽·영국 규제 당국은 자금 출처와 시장 영향을 더 깐깐하게 보고 있어, 규제 판단의 대륙 간 온도차가 드러나고 있다.
워런 “부패의 냄새”…정치 전선으로 옮겨붙은 빅딜
정치권 공방도 거세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민주·매사추세츠)은 이번 승인을 두고 “트럼프와 가까운 억만장자들이 무엇을 보고 얼마를 낼지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는 모든 미국인에게 끔찍한 소식”이라며 “주 법무장관들이 이 합병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런 의원은 거래 배후의 외국 자본에 대해 연방통신위원회(FCC)와 재무부가 검토에 나설 것을 촉구해 온 민주당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다만 현재까지 미국 정부 기관이 그런 검토에 착수했다는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
넷플릭스 변수…‘로비 의혹’ 공방과 무산된 인수전의 그림자
이번 사안에는 넷플릭스를 둘러싼 신경전도 얽혀 있다. 파라마운트 최고법무책임자 마칸 델라힘은 6월 5일 반독점국에 보낸 서한에서 넷플릭스가 규제 당국을 상대로 이번 합병에 반대하는 로비를 강하게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넷플릭스의 대응을 두고, 파라마운트를 규모 있는 경쟁자로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보여 주는 정황이라고 적었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12월 WBD의 스트리밍·스튜디오 사업 인수에 합의했다가, 파라마운트가 WBD 전체에 대한 인수가를 높이자 2월에 입찰에서 물러난 바 있다. 넷플릭스 측은 델라힘의 주장에 대해 “몇 달 전 이미 손을 뗐고 우리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거래 승인 여부와 업계 이익 판단은 규제 당국의 몫이라고 반박했다.
델라힘은 별도로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인터뷰에서 워싱턴 일각의 반대 기류를 “정치 캠페인”으로 규정하며, 일부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적 시각 때문에” 거래에 해를 끼치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어떤 반대자를 지목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합병을 둘러싼 갈등이 경쟁 논리를 넘어 정치적·감정적 충돌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관전 포인트] 협상 창구 줄어드는 글로벌 콘텐츠 시장…한국 산업의 셈법
이번 통합은 한국 콘텐츠 산업에도 간접적 파장을 남긴다. 글로벌 시장에서 콘텐츠를 사고파는 대형 ‘바이어’가 한 곳으로 합쳐지면, 제작·판권 협상에서 공급자가 마주하는 창구가 그만큼 줄어든다. 협상력의 비대칭이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통합 플랫폼이 글로벌 가입자 확대를 위해 비영어권 오리지널과 라이브러리 확보에 공격적으로 나설 경우, 경쟁력 있는 한국 콘텐츠에는 새로운 유통 기회가 열릴 여지도 있다.
미국 규제 당국이 ‘빅테크에 맞선 규모의 경쟁’을 명분으로 거대 통합을 허용한 점도 한국 미디어·정책 진영이 주시할 대목이다. 스트리밍 시대의 경쟁 정책과 산업 정책을 어떻게 설계할지, 그리고 한국 사업자들이 글로벌 재편 속에서 어떤 동맹과 유통 전략을 택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주주 승인 마치고 7월 말 종료 겨냥…변수는 소송과 유럽 심사
워너 주주들은 이미 4월에 합병을 압도적으로 승인했다.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는 법무부 심사 종결 이후 “가능한 한 빨리 거래를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내놨고, 경영진은 임직원에게 이르면 7월 말 종료를 준비하라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7월 초·중순으로 예정된 유럽연합의 두 차례 심사 시한과 주 법무장관들의 제소 가능성이 막판 변수로 남아 있다. 데이비드 엘리슨이 이끄는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가 이 관문들을 통과하면, 미디어 산업의 지형을 다시 그리는 거대 통합이 현실이 된다. 반대로 어느 한 곳에서 제동이 걸릴 경우 일정과 거래 구조 모두 다시 흔들릴 수 있다.
자료: 월스트리트저널(2026. 6. 13), 버라이어티(2026. 6. 12), 미 법무부 반독점국 성명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