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황금종려상(Palme d'Or d'honneur) 마스터클래스서 'AI=도구·특수효과' 입장 … "배우 초상권 라이선싱은 절대 조건"
영화 속 AI는 위협이 아니라 또 하나의 특수효과다. 다만 배우 얼굴을 빌리려면 본인이나 유족의 사전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칸영화제(Festival de Cannes) 명예황금종려상(Palme d'Or d'honneur)을 받은 피터 잭슨(Peter Jackson) 감독이 5월 13일(현지시간) 칸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 마스터클래스(masterclass)에서 내놓은 'AI 도구론'이다.
2023년 미국 작가·배우 파업 이후 'AI는 대체 위협'과 'AI는 생산성 도구'라는 양극단으로 갈라져 있던 할리우드(Hollywood) AI 논쟁에 새로운 좌표 하나가 더해졌다.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제작비 구조와 초상권 권리관계를 동시에 흔드는 국면에서,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으로 모션캡처(motion capture)와 디지털 캐릭터의 시대를 연 VFX 혁신가가 'AI는 그저 도구'라는 입장을 공식 무대에서 꺼내든 셈이다.
잭슨 감독은 마스터클래스에서 "AI를 제대로 쓰면 다른 도구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핵심은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과물이 흥미로운지, 재미있는지, 상상력이 있는지, 이야기로 잘 엮였는지가 관건"이라며 "같은 과정을 거쳐도 누군가는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형편없는 영화를 만든다. 일반 영화도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비유 대상으로는 1933년 〈킹콩〉(King Kong)과 레이 해리하우젠(Ray Harryhausen)의 스톱모션(stop-motion)을 끌어들였다. 그는 "그건 누군가가 고무 인형을 손으로 움직여 찍은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사람이 AI 소프트웨어로 자기만의 이미지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디지털 캐릭터로 영화 문법 자체를 바꾼 감독이 내놓은 발언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AI 옹호'가 아니라 영화기술사 안에 AI를 위치 짓는 시도에 가깝다.

다만 잭슨은 AI 전반에 대한 낙관론과는 거리를 뒀다.
"지금 말하는 AI는 세계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그 AI가 아니다. 영화에서 쓰는 AI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단서를 달았다. 할리우드 리포터와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잭슨이 영화 속 AI를 부르는 단어는 일관되게 "또 하나의 특수효과(another special effect)"였다.
조건은 따로 달았다. 배우의 얼굴을 AI로 재현할 때는 본인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AI로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든 누구든 디지털 복제본을 만들 때, 그 사람의 권리를 라이선싱(licensing)했다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누군가의 외모를 훔쳐 도용할 때"라고 말했다.
잭슨은 이 원칙을 음악·출판 저작권과 같은 선에 놓았다. "노래를 영화에 쓰려면 권리를 가져야 하고, 책을 각색하려면 라이선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얼굴을 AI 기법으로 보여주려면 본인이나, 사망했다면 유족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는 "꽤 단순한 이야기"라며 "왜 그렇게 우려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자리에서 잭슨이 짚은 또 하나의 대목은 모션캡처 연기의 시상식 평가절하 문제였다.
반지의 제왕 골룸(Gollum) 역의 앤디 서키스(Andy Serkis)를 두고서다. 그는 "지금처럼 모두가 AI를 걱정하는 환경에서는 골룸 같은 캐릭터나 생성형 캐릭터가 상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특히 앤디 서키스의 경우 AI가 생성한 연기가 아니라 100% 사람이 만든 연기인데도 그렇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모션캡처 기반 디지털 캐릭터 연기가 'AI 캐릭터'와 혼동되며 연기상 후보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짚은 발언이다.
서키스가 직접 연출과 주연을 맡는 신작 〈헌트 포 골룸〉(The Hunt for Gollum)을 자신이 메가폰을 잡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이 영화는 골룸의 심리와 중독에 관한 작품이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앤디다. 가장 흥미로운 버전의 이 영화는 앤디 서키스가 만드는 버전이라고 생각했다."
잭슨이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12일 칸영화제 개막식이었다.
시상자는 프로도(Frodo) 역을 맡았던 일라이저 우드(Elijah Wood)였다. 우드는 무대에서 "당신은 세상이 본 적 없는 것을 보여줬고,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며 "그는 세계의 가장 먼 변방에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 제작 문화를 일궈냈다"고 헌사했다.
잭슨은 답사에서 25년 전인 2001년 칸이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20분 클립을 호평한 일을 회고했다. 당시 미디어는 거대 예산 3부작을 'folly(어리석은 짓)'라고 불렀는데, 칸의 반응이 영화에 대한 외부 인식을 바꿔놓는 분기점이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다음 날 마스터클래스에는 우드가 객석에 앉아 잭슨을 응원했다. 잭슨은 무대 위에서 "엘리야는 다른 누구보다도 매일 한결같이 쾌활했다"며 "촬영장 가는 길에 절망 속에 있을 때마다 그는 '자, 오늘은 뭘 할까요'라는 식이었다. 그 에너지가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영화 산업의 AI 논쟁은 한쪽 끝의 '대체 위협론'과 다른 한쪽 끝의 '도구론'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잭슨의 발언이 흥미로운 지점은, 디지털 캐릭터 시대를 직접 연 창작자가 '도구론' 진영에 서되 '초상권 라이선싱'을 절대 전제로 둔 부분이다. 기술의 정당성보다 권리 처리의 정당성을 먼저 짚는 메시지다.
AI 학습·생성 단계에서 초상권과 보컬 등 인격적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산업 표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칸 무대에서 던져진 잭슨의 기준선은 향후 미국 배우조합(SAG-AFTRA)·스튜디오 스트리밍 플랫폼 간 계약 협상의 참고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편, AI가 쓴 영화·드라마에 대한 시청자 반감도 세대 불문하고 더 커지고 있다.
일루미네이트(Illuminate)의 ‘미국 엔터테인먼트 365’ 조사에 따르면, “이 작품이 생성 AI로 집필된 것임을 알고도 보고 싶다”는 응답은 2025년 5월과 11월 모두 세대 전반에서 순마이너스(반대가 찬성보다 많음)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Gen Pop)의 AI 각본 선호도 순지표는 2025년 5월 -11%에서 11월 -19%로 더 악화됐고, Z세대를 포함한 젊은 층(Gen Alpha+Gen Z)도 -4%에서 -13%로 부정 여론이 눈에 띄게 확대됐다.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5월에는 찬반이 거의 비슷했지만 11월에는 -5%로 돌아섰고, X세대는 -9%에서 -20%로 급락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거부감은 가장 강했다. 2025년 5월 이미 -31%였던 순지표가 11월에는 -35%까지 떨어지며 “AI 각본”에 대한 반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AI가 각본 단계에 들어올수록 시청자의 불편함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콘텐츠 소비 의향 자체를 훼손할 수 있는 잠재 위험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모든 세대에서 6개월 사이 AI 각본 선호도가 추가 하락한 점을 들어,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AI를 도입할수록 ‘AI로 썼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신뢰를 관리할지에 대한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