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 스피겔 “컴퓨팅의 새로운 시대”… 메타·구글·애플과 ‘포스트 스마트폰’ 정면 승부, 글로벌 캠페인엔 정호연 합류

스펙스(SPECS) 글로벌 캠페인.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 촬영. ⓒSnap Inc.
스냅(Snap)이 소비자용 증강현실(AR) 글래스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에반 스피겔(Evan Spiegel) 스냅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6일(현지시간) AR 글래스 ‘스펙스(SPECS)’의 사전 예약을 전용 사이트(SPECS.COM)에서 시작했다.
가격은 2,195달러(환불 가능 보증금 200달러)이며, 올가을 미국·영국·프랑스에서 출고된다. 아이폰 등장 이후 약 20년이 지나며 모바일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화면 피로와 디지털 웰빙을 둘러싼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메타(Meta)·구글(Google)·애플(Apple) 등 자본력을 갖춘 빅테크가 잇따라 스마트 글래스 시장에 진입하면서 ‘포스트 스마트폰’ 경쟁이 본격화하는 흐름이 이번 출시의 배경에 자리한다.
스피겔 CEO는 “스펙스는 컴퓨팅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라며 “수십 년 동안 컴퓨터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고, 그 순간에서 빠져나오라고 요구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스마트폰이 우리 삶을 주머니에 넣었다면, 스펙스는 삶이 실제로 펼쳐지는 세상 속으로 컴퓨팅을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스냅은 10여 년간 개발자 도구, 자체 운영체제, 디스플레이, 광학, 컴퓨터비전 등 AR 전 영역에 투자하며 7,000건이 넘는 특허를 출원했다고 밝혔다.
스펙스는 ‘AI 글래스보다 강력하고, 헤드셋보다 착용성이 좋은’ 새로운 범주를 표방한다. 별도의 본체(퍽)나 연결선 없이 단독으로 작동하는 독립형 기기로, 오늘날 기기들이 강요해 온 성능과 착용성 사이의 맞교환을 넘어서겠다는 구상이다.
스냅의 전략은 경쟁사와 결이 다르다. 메타는 에실로룩소티카(EssilorLuxottica) 산하 레이밴(Ray-Ban)과, 구글은 삼성전자 및 워비파커(Warby Parker)·젠틀몬스터(Gentle Monster)와 손잡고 안경 부문을 외부에 맡겼지만, 스냅은 프레임과 소프트웨어를 모두 직접 만든다.
스피겔 CEO는 음성 중심의 스마트 글래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능이 없는 매우 가벼운 안경”이라며 “휴대전화 액세서리나 오픈이어 헤드폰에 가깝다”고 선을 그었다.

사양과 사용 경험
스펙스는 스위스산 고성능 TR90 폴리머로 제작됐고, 47㎜ 모델 132g, 52㎜ 모델 136g의 두 가지 크기로 나온다. 도수 인서트는 교체할 수 있어 다양한 시력에 대응한다. 디스플레이는 스냅 자체 LCoS(liquid crystal on silicon) 방식으로, 시야각 51도에 1,600만 컬러를 구현한다. 업무용으로는 24인치 데스크톱 모니터, 영상 감상 시에는 약 3m(10피트) 거리의 최대 115인치 홈시네마 화면에 해당하는 크기로 보인다.
재설계한 웨이브가이드에는 머리카락 끝에 1만 개 이상 들어갈 만큼 작은 나노구조 수십억 개가 적용돼 왜곡을 줄였다. 보잉 787 드림라이너 창문에 쓰인 기술을 응용한 전기변색 렌즈는 10초 만에 투명에서 틴트로 바뀐다. 컴퓨터비전용과 렌즈 구동용 스냅드래곤 프로세서 2개를 탑재해 고속 손 추적과 낮은 지연을 지원하며, 모션-투-포톤 지연은 7밀리초로 디지털 콘텐츠가 현실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배터리는 혼합 사용 기준 최대 4시간이며, 동봉된 충전 케이스로 4회를 추가 충전해 총 20시간까지 쓸 수 있다.
활용 방식은 길 안내와 공간 측정, 맥락형 AI 비서를 필요한 순간에 띄우는 것에서부터, 대형 사적(private) 디스플레이로 콘텐츠를 스트리밍하거나 화면을 캐스팅하고 화이트보드를 열어 어디서나 작업공간을 만드는 것까지 아우른다. 개발자들이 만든 수백 종의 렌즈(Lens)는 골프 그린 읽기, 드럼 위에 연주 가이드를 겹쳐주는 ‘드럼 키트(Drum Kit)’, 보이지 않는 힘을 시각화하는 교육용 ‘벡터 필즈(Vector Fields)’ 등 화면으로는 어려운 공유 경험을 제공한다.

개발자 생태계와 AI, 프라이버시
스냅은 스펙스 개발자 생태계를 위한 새 도구도 함께 공개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스냅 OS 업데이트 10회와 40개 이상의 신규 기능·API를 내놓았고, 개발자들은 이미 수백 종의 렌즈를 선보였다. 렌즈 스튜디오(Lens Studio)에는 아이디어 탐색부터 프로토타입·테스트·디버깅·최적화·배포·개선까지 돕는 에이전트형 개발 기능이 도입됐으며, 개발자 프리뷰는 앤트로픽(Anthropic)의 클로드 코드(Claude Code), 오픈AI(OpenAI)의 코덱스(Codex), 커서(Cursor)에서 제공된다. 이와 함께 공간 작업에서 AI 모델의 성능을 평가하는 ‘스펙스 스페이셜 벤치마크(SPECS Spatial Benchmark)’, 기존 프로젝트 이식을 돕는 ‘마이그레이션 에이전트(Migration Agent)’, 외부 코드·라이브러리를 끌어올 수 있는 ‘네이티브 개발 키트(Native Development Kit)’가 공개됐다. 스피겔 CEO는 “스펙스에서 AI는 채팅창에 갇힌 지능이 아니라, 당신이 보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해 그 순간 돕는 지능”이라고 말했다.
개인용 기기로 컴퓨팅이 옮겨오는 만큼 스냅은 프라이버시 우선 설계를 내세웠다. 스펙스는 민감한 정보에 접근하기 전 명확히 동의를 구하고, 녹화 중에는 LED가 점등되며, 데이터는 기기 내(온디바이스) 처리를 우선한다. 저장·동기화·공유·삭제 여부는 이용자가 통제한다. 스피겔 CEO는 “스펙스는 사람들이 신뢰할 때만 작동한다”며 “프라이버시는 처음부터 내장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냅은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이 촬영한 글로벌 캠페인도 공개했다. ‘비저너리(Visionaries)’로 농구선수 지미 버틀러(Jimmy Butler), 음악가 이모젠 힙(Imogen Heap), 모델 겸 배우 정호연(Hoyeon), 래퍼 잭 할로(Jack Harlow), 모델 카이아 거버(Kaia Gerber)가 참여했다. 이들이 스냅과 함께 구상한 스펙스 경험은 올가을 공개될 예정이다.
투자자 압박과 시장의 회의론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 메타와 구글은 막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디지털 광고 사업을 바탕으로 값비싼 하드웨어 실험을 이어갈 여력이 있는 반면, 스냅은 상장 이후 매년 적자를 기록해 왔다. 스냅은 올해 1월 AR 글래스 개발을 전담할 자회사 ‘스펙스(Specs Inc.)’를 신설했다. 스펙스 발표 직후 스냅 주가는 장중 약 4% 하락했다.
스피겔 CEO는 투자자들을 향해 “창업할 때부터 우리는 장기적 관점에서, 커뮤니티와 고객을 위해 사업을 운영하겠다고 줄곧 강조해왔다”며 “투자자들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될 것이지만,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스피겔 CEO는 소셜 네트워크의 미래를 ‘대면 상호작용으로의 회귀’에서 찾고 있다.
지난 6월 22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악시오스(Axios)와의 대담에서 그는 “소셜 네트워크의 미래가 실제로는 대면 상호작용으로 돌아가되, 컴퓨팅으로 강화되는 것”이라며 “화면에서 벗어나 투명한 글래스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스냅챗의 위치 기반 광고 ‘프로모티드 플레이스(Promoted Places)’를 “대박(smash hit)”이라고 표현했는데, 위치 정보를 공유하는 스냅 맵(Snap Map)의 월간 활성 이용자(MAU)는 전 세계 4억5,000만 명에 이른다.
회의적 시선도 있다. 시장조사기관 IDC의 지테시 우브라니(Jitesh Ubrani) 리서치 매니저는 “어떤 기업이든 프리미엄 제품을 내놓기에 지금이 최악의 시기”라며, 인플레이션이 소비자 신뢰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고가 전자기기는 판매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봤다.
특히 스냅에 대해서는 “핵심 이용자층이 늘 젊은 세대에 치우쳐 있었고, 통상 그 세대는 큰돈을 쓸 여력이 없다”고 짚었다. 앞서 등장한 가상현실(VR)은 여전히 틈새에 머물러 있다. 3,500달러부터 시작하는 애플 비전 프로(Vision Pro)는 막대한 투자에도 아이폰을 잇는 킬러 제품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메타는 올해 VR 사업을 축소하며 ‘호라이즌 월드(Horizon Worlds)’를 로블록스(Roblox)와 유사한 모바일 앱으로 전환했다. 스냅은 10억 이용자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1분기 기준 MAU는 9억5,600만 명이다.
한국 미디어·콘텐츠 산업에 주는 함의
이번 출시에서 한국과의 접점이 두드러진다. 글로벌 비저너리 명단에 모델 겸 배우 정호연(Hoyeon)이 이름을 올렸다.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의 출시 마케팅에 K-스타가 전면에 선 것으로, AR 글래스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인재 풀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국 인물·콘텐츠 IP가 활용될 통로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렌즈 중심의 개발자 생태계는 한국 콘텐츠·기술 기업에 새로운 진입로가 될 수 있다. 에이전트형 개발 도구가 클로드 코드·코덱스·커서로 제공되면서 제작 장벽이 낮아졌고, 스펙스 전용 렌즈는 이미 수백 종이 나와 있다. 위치와 공간 정보를 활용한 몰입형 경험은 그동안 스트리밍과 FAST로 확장돼 온 K-콘텐츠 유통이 공간 컴퓨팅 영역으로 넓어질 여지를 시사한다. 화면 밖 현실 위에 콘텐츠를 겹치는 방식이 자리 잡을수록, 어떤 형식과 권리 구조로 K-콘텐츠를 공급할지에 대한 재검토가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하드웨어 경쟁 구도도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 구글은 삼성전자와 함께 AI 글래스를 준비하고 있고, 스펙스의 핵심인 LCoS 디스플레이와 웨이브가이드·광학 부품은 한국이 강점을 지닌 디스플레이·광학 산업과 맞닿아 있다. 완성품 경쟁과 별개로 부품·디스플레이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커질 수 있는 영역이다.
프라이버시 설계는 정책적 함의를 남긴다. 녹화 표시 LED, 온디바이스 처리, 이용자 데이터 통제권 같은 장치는 카메라를 상시 착용하는 기기를 둘러싼 국내 개인정보·미디어 규제 논의에 참고가 될 수 있다. 스피겔 CEO가 그린 “컴퓨팅이 우리를 북돋우고, 서로를 가깝게 하며, 주변 세계와 다시 이어주는 미래”가 현실화하는 속도에 따라, 한국 미디어 산업이 마주할 플랫폼 지형도 함께 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