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삼석의 인사이트]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콘텐츠 산업 공진화 전략

고 삼 석 동국대 첨단융합대학 석좌교수(전 방송통신위원 상임위원)

국가AI전략위원회 분과위원

— 한국 콘텐츠 산업과의 경쟁이 아닌 공진화(Coevolution), 그 가능성과 전략적 시사점-

2021년 2월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레이시아 디지털 경제 청사진(Malaysia Digital Economy Blueprint, MyDIGITAL)’에서 ‘2030년 글로벌 디지털 콘텐츠 허브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공식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간 말레이시아를 디지털 기반의 고소득 국가이자 디지털 경제의 지역 리더로 도약시키겠다는 국가 전략이다.

MyDIGITAL에 따르면 디지털 수용을 위한 기초 강화(2021~2022년), 포용적 디지털 전환 가속화(2023~2025) 단계를 거쳐 지금은 디지털 콘텐츠 및 사이버 보안의 지역 선도국 실현(2026~2030년) 단계에 진입했다.

[Samseog Ko’s Insight]Co-Evolution, Not Competition: A Strategy for Korea-Malaysia Content Industry Partnership
Malaysia’s 2030 “Global Digital Content Hub Nation” strategy, as proposed by Mr.Samseog Ko, envisions Malaysia as a Southeast Asian base for digital content and AI that co-evolves with Korea through joint IP development, co-production, and market expa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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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획을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디지털경제공사(Malaysia Digital Economy Corporation, MDEC)는 이를 더 구체화한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생태계(Digital Creative Ecosystem, DICE) 로드맵을 수립했다. 이 로드맵은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확장현실(XR) 등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를 ‘디지털 콘텐츠 허브’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제시한 ‘2030 글로벌 디지털 콘텐츠 허브 국가’는 단순한 문화정책 차원의 비전 선포가 아니라, 천연 자원과 전통 제조업 중심 성장 모델의 한계를 뛰어넘어 디지털 전환과 콘텐츠 산업을 새로운 국가 성장의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이 전략의 성공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고, 한국과의 공진화(Coevolution) 전략을 모색하는 것은 한국 콘텐츠 정책과 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 말레이시아의 미래 성장을 상징하는 아이콘
사진 제공 저자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전략

말레이시아 콘텐츠 허브 전략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이나 미국처럼 자국 IP가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는 ‘콘텐츠 강국’이 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수출되며,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는 ‘허브’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영어 사용 환경, 다문화 사회, 동남아와 이슬람 문화권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는 이 전략에 구조적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OTT 및 게임 기업, AI 빅테크 그리고 중동 자본이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시아는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제작 및 실험이 가능한 거점으로 위상을 확립할 가능성이 높다.

정책 수단 측면에서도 말레이시아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있다.

디지털 콘텐츠 그랜트, 영화 제작 리베이트, 외국 기업 유치 인센티브, 인력 양성 프로그램 등은 이미 잘 작동되고 있다. 또한 기존 제작 파이프라인이 고착되지 않았다는 점은 AI 기반 콘텐츠 제작 워크플로우를 기본값으로 구축할 수 있는 후발주자의 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말레이시아는 짧은 시간 내에 ‘글로벌 제작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저자가 MDEC CEO 아누아르 파리즈 파즈일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제공 저자

구조적 한계와 성공 가능성

그러나 구조적 한계 역시 분명하다. 가장 큰 리스크는 오리지널 글로벌 IP의 부재이다. 제작 허브로서의 성공이 곧 콘텐츠 강국으로의 도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랫폼 중심의 외주(하청)·공동 제작 구조가 고착될 경우, 시장 규모가 커지고 고용은 늘어나더라도 IP 소유권과 산업 주도권은 확보하지 못한다. 또한 유능한 프로듀서와 쇼러너(Showrunner), 게임 디렉터와 같은 핵심 인재는 단기간에 양성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미디어 및 영상 콘텐츠와 문화예술 그리고 디지털 콘텐츠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조직이 여러 개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정부의 콘텐츠 산업 육성 전략은 최종적으로 성과를 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콘텐츠 산업이 국가의 디지털 전환 및 디지털 경제의 핵심 정책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를 위해 국가 자원을 디지털 콘텐츠 산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밸류 체인에서 말레이시아가 ‘반드시 필요한 중간 허브’로 자리를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평가될 것이다. 이제 관심은 말레이시아의 글로벌 콘텐츠 허브 전략이 한국 콘텐츠 산업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이다.

말레이시아 투자무역산업부(Minister of MITI) 차관 Sim Tze Tzin(오른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저자
사진 제공 저자

경쟁이 아닌 공진화 —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전략적 파트너십

냉정하게 보면 한국 입장에서 말레이시아는 경쟁자라기보다 ‘전략적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콘텐츠 기획력과 제작 역량, ‘K-콘텐츠 또는 컬처’라는 글로벌 브랜드 파워를 갖춘 국가이다. 반면 글로벌 플랫폼에 대한 높은 의존도, 제작비 상승에 따른 부담, AI 기반 제작 실험이라는 과제도 안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이 과제를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거점이다. 한국은 핵심 IP와 크리에이티브를 주도하고, 말레이시아는 공동 투자 및 제작, 동남아시아와 이슬람권 확장의 허브 역할을 맡는 분업 구조가 가능하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간 콘텐츠 분야 공진화 전략의 핵심은 ‘하청’이 아니라 ‘공동 진화’이다. 한국 콘텐츠 기업이 말레이시아를 저비용 제작 기지로 활용한다면, 이는 단기 효율은 높일 수 있어도 장기 파트너십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반대로 공동 IP 개발, 공동 제작 및 시장 확장을 전제로 협력할 경우 말레이시아의 글로벌 허브 전략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도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향후 5년, 공진화의 전환점

최종적으로 말레이시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2030년 글로벌 디지털 콘텐츠 허브 국가’ 도약 전략은 한국 콘텐츠 산업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경로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최종 타결된 한-말레이시아 자유무역협정(FTA)은 그것의 신호탄이자 촉진제가 될 것이다. 즉 향후 5년은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경쟁이 아닌 공진화 전략을 통해 아시아와 글로벌 콘텐츠 생태계의 새로운 질서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필자 소개

고삼석 교수는 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으로, 30여 년간 미디어·콘텐츠·정보통신(IT) 정책을 다뤄온 국내 대표 미디어·디지털 정책 전문가이자 한류 연구자다. 현재 동국대학교 첨단융합대학 석좌교수이자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인공지능과 미디어·K-콘텐츠 정책을 결합한 연구와 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저서 『넥스트 한류: 엔터테인먼트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만들 한류의 미래』에서 AI 시대 한류의 지속가능성과 K-콘텐츠 전략을 분석하고, 생성형 AI 기반 엔터테크(EnterTech)를 한류 확장의 핵심 축으로 제안한다. 이 책은 출간 직후 글로벌 학술출판사 제안을 받아 영어판 출간을 추진하는 등, 한류·K-콘텐츠 담론의 글로벌 전개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CES 등 국제무대에서 한·미 엔터테크 얼라이언스와 AI 시대 한류의 공진화(co-evolution)를 제안하며, 한국 K-콘텐츠와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글로벌 기술·미디어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협력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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